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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더 큰 어울림, 더 큰 자유

by 구자범 2014. 12. 13.

더 큰 어울림, 더 큰 자유



1. 

쪽방에 붙은 창 밖으로 바다가 보인다. 

턱을 손에 괴고 바라보고 있으면 바다 없이 사십년이 넘도록 어떻게 살아왔나 싶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바다가 아니라 바닷가이다. 

망망대해에 떠있고 싶지도 않고, 심해에 들어가고 싶지도 않다. 

그저 그 커다란 바다의 아주 작디 작은 부분인 가장자리만을 좋아할 뿐이다. 

내게는 오로지 이런 가장자리만 의미가 있나보다. 이 바닷가를 향한 창 밑에, 드디어 피아노를 하나 놓았다. 


며칠 전, 술을 마시다 말고 갑자기 미치도록 피아노가 치고 싶어졌다. 

꿈틀꿈틀 살아있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생각해 보니 음악을 시작한 이후로 나는 한 번도 내 집에서 피아노를 쳐 본 일이 없었다. 

피아노가 없었으니까. 

내가 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라도 좀 내 귀를 배려해 주기로 결심하며 술집을 나왔다.

 

다음날,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이자를 내기로 하고 최~장 할부로 무작정 피아노를 들여놓았다. 

가장 가난할 때 지름신이 몸소 강림하셨다. 

하지만 긴축재정을 위해 살도 뺄겸 좀 굶기로 했는데도 배가 하나도 안 고프다. 

소유개념으로 따지면 내 인생의 첫 피아노이다. 

어릴 적 집에 있던 피아노를 누나가 시집갈 때 가져간 이후로 내 집에 피아노가 놓인 것은 처음이다. 

음악인이랍시고 이십여년을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피아노를 가진 적이 없던 나로서는 펄쩍펄쩍 뛸만큼 신난다. 

바닷가가 보이는 창문과 피아노의 조합은 그 어떤 우울증도 사라지게 할 만한 명약이다. 

그 동안은 누군가 내게 음악을 배우고 싶다고 찾아 올 때마다 부끄럽게도 카페나 노래방을 찾아 들어갔었다. 

이젠 음악을 배우고 싶다며 삼고초려한 어린 학생에게도 직접 소리를 들려주며 음악에 대해 알려줄 수 있게 되었다. 

뿌듯하다.


내 피아노의 현의 갯수부터 세어 본다. 

좋은 피아노일수록 현의 수가 더 많다. 

피아노 전공을 하는 사람들도 자기 피아노의 현이 몇 개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단다.

나는 요 피아노를 하나하나 잘 보살펴 주겠다는 다짐을 하며 이름을 붙여주고 생색을 낸다. 


처음 온 조율사는 세시간이 지나자 말도 안되는 소리가 나는데도 조율이 끝났다고 말했다. 

내가 어떤 귀를 가졌는지 신경을 안 쓴 건지, 그의 귀에 문제가 있는건지는 모르겠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음정의 피아노를 놓고 있으면 잘못하다간 피아노 없을 때 보다 더 우울해 질 판이다. 

수소문을 해서 다른 전문 조율사를 불렀다. 

이 분은 다행히도 내가 옆에서 내내 지켜보며 까탈스럽게 음정을 체크하는 스트레스를 감내하더니, 

결국 일곱시간이 지나자 제대로 된 평균율을 구현해 놓는다. 

‘책에만 나오는 줄 알았는데, 진짜 이런 귀를 가진 사람이 있네요!’

라며 찬사인지 불평인지 모를 감탄사만을 몇 번씩이나 내뱉는다. 

다시는 안 오겠다고 할까봐 걱정이다.


조심스레 피아노를 쳐본다. 

고등학교 때 읽었던 김지하 시인의 소리집에는, 

‘왜놈’인 ‘三寸待’(조또마떼)가 한국에 와서 싸지르기 위해 똥을 평생 참아야 하기에, 

똥 생각을 못하도록 만든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금지 조항들을 수도 없이 많이 읊는 장면이 있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나는 것은 ‘똥’하고 울리는 피아노 소리를 듣는 것도 금지라는 조항이다. 

다행히도 내 피아노는 일본 사람이 만들었지만 똥똥거리지 않는다. 

행복하다.


달이 없는 깜깜한 창에 달을 띄우고 싶으면 드뷔시의 ‘달빛’을 연주하면 된다. 

빛방울이 소리방울로 변해 바닷가 물결 위로 도롱도롱 떨어진다. 

아름다웠던 그녀가 그리우면 슈만의 ‘시인의 사랑’ 첫 곡을 연주하면 된다. 

바람에 살포시 찰랑거리던 상냥한 그녀의 머릿결 내음이 소리를 타고 흘러 들어온다. 

‘찬란하게 아름다운 오월에’로 시작하는 가사가 너무 애틋하다. 

아, 노래도 하고 싶다. 하지만 내가 이 노래를 하기엔 너무 음역이 높구나. 

문제없다. 내 목소리의 음역에 맞게 조를 바꾸어 연주하면 된다. 

고맙다, 평균율이여. 

이게 다 평균율 덕분이다. 



2. 

평균율은 혁명이다. 

평균율(well-tempered tuning)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음역에 맞게 노래할 수 있도록 조옮김이 가능한 조율법인데, 

옥타브를 12로 균등하게 나눈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지금은 이게 왜 혁명인지 이해하기 힘들 정도이다. 

그러나 평균율의 역사는 불과 얼마 길지 않다.


평균율은 ‘어울림’을 위해 만들어졌다. 

‘화성’이라는 음의 어울림이 필요 없다면 평균율도 필요하지 않다. 우리 고유 음악엔 화성이 없다. 

우리의 음계와 그 조율법으론 서로 다른 음의 어울림을 만들어 내기 어렵고, 그럴 이유도 없다. 

국악기 합주를 보면 우리 악기들은 화음을 내지 않는다. 

모든 악기가 똑같은 음을 동시에 연주한다. 

우리 음악에서 ‘화음’은 음정간의 어울림이 아니라 ‘음색’의 어울림일 뿐이다. 

하지만 서양에선 동시에 내는 다른 음정간의 어울림이라는 ‘화성’에 관심을 가졌다.


현을 정수비로 분할하면 깨끗한 음정이 생겨난다. 

예를 들어 어떤 현의 음정이 ‘도’일 때, 그 현을 2/3로 만들면 ‘솔’의 음정이 난다. 

이 ‘도-솔’을 ‘완전 5도’라고 한다. 

이 완전 5도는 동시에 소리를 냈을 때 ‘웅웅’하는 음파의 간섭(전문용어로 맥놀이)이 생기지 않는다. 

이 맥놀이를 없애는 것이 바이올린 같은 순정률 악기를 조율하는 간단한 방법이다. 

즉 기본음 ‘라’와 완전 5도 높은 음인 ‘미’를 활로 동시에 그엇을 때 맥놀이가 생기지 않고 깨끗한 소리가 들리면 그 음은 ‘맞게 조율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정수비로만 음정을 만들다 보면, 불행히도 다른 조에서는 전혀 엉뚱한 소리가 난다. 

조가 다르면 ‘도 샾’과 ‘레 플랫’은 완전히 다른 음정이 되는 것이다. 

결국 순정률 건반악기에서 조를 바꾸어 연주하려면 끔찍하게도 처음부터 일일이 다시 조율을 해야 한다. 

한마디로 조옮김이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발명된 것이 이 음간을 균등하게 나누는 평균율이다. 

균등하게 나누면 ‘도 샾’과 ‘레 플랫’이 같은 소리가 된다. 

서양인들은 이 율에 ‘좋게 조율된’(well-tempered)이란 이름을 붙였다. 


학교에서 피아노로 ‘도-솔’을 누르고 이 소리가 ‘완전 5도’라고 가르치는 것은 엄밀히 말해 거짓말이다. 

사실 완전 5도는 맥놀이가 일어나지 않기에 ‘완전’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피아노는 평균율로 조율되었기 때문에 원래 완전 5도보다 음의 간격이 좁아져서 파장이 서로 간섭하는 ‘웅웅’하는 맥놀이가 들린다. 

만약 그게 안들리면 자신의 귀가 선천적으로 나쁘거나, 조율이 잘못되었거나, 

그것도 아니면 하도 평균율에 세뇌되어서 이제는 듣고도 못 느끼는 장애를 얻은 것이다. 

평균율로 조율된 피아노의 5도는 말하자면 ‘불완전’ 5도인 것이다.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인 내 ‘지음’은, 

바이올린을 조율할 때 줄 길이를 조절해가며 아무런 생각없이 두 줄을 동시에 긋다가 가장 ‘행복한’ 소리가 나면 잘 조율이 된 거라고 말한다. 

정확히 맞는 말이다. 

맥놀이 없는 깨끗한 소리는 우리를 매우 행복하게 한다. 

그러니 생각해 보라. 어떤 음악인이 이런 순결한 완전 음정을 포기하고 싶을까. 

원래는 음계 내에서 음의 간격이 일정하지 않기에 깨끗한 화음을 들을 수 있는 것이지만, 

음간을 균등하게 나눈 평균율로 조율된 악기에서는 ‘옥타브’ 음정 (완전 8도) 외에는 모든 화음이 다 불완전하다. 

간섭현상으로 맥놀이가 난잡하게 요동하는 순정률 음악가의 지옥인 것이다. 


그러나! 

이 순결한 음정을 포기하더라도 모든 조성으로 연주할 수 있도록 이러한 평균율을 사용하면 어떻겠냐는 수학자와 물리학자의 무례한 제안을, 

위대한 음악가(!)인 바흐는 받아들였다. 

정말 서양 근대음악의 아버지라 불러도 될만 하다. 

용감하게도 그는 각기 다른 12개 조성의 음악을 ‘한 작품’으로 작곡한다. 

결국 순결한 음정을 포기하고 불순한 평균율로 조율한 건반악기만이 이 아름다운 작품을 연주할 수 있다! 


화음이란 어울림이다. 

몇몇 음정들끼리의 ‘완전’한 어울림을 고집하면, 물리적으로 모든 음정들의 어울림은 불가능할 수 밖에 없다. 

‘더 커다란 어울림’을 위해 기꺼이 자신이 고유하게 간직해 온 완전한 어울림을 포기하겠다는 발상은, 

무엇이 ‘진정한 어울림’인가에 대한 놀라운 통찰이고, 

그것을 수용한다는 것은 순수함을 추구하던 음악가로서는 대단한 용기이다. 

바흐 이전에는 한 건반악기가 연주할 수 있는 조성이라곤 불과 몇개 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든 음정들이 조금씩 양보해서 음간이 평등해지자, 

그 결과 모든 음정이 서로 어울려 모든 조성으로 노래할 수 있는 엄청나게 커다란 자유를 맛보게 된 것이다.


놀랍다. 

‘민주주의 하자!’라고 하면 나랏님에 대한 역적으로 몰려 동네에서 멍석말이를 당할 세상에서, 

어떤 사회학자나 경제학자가 왕에게 감히 건의를 한다고 상상해 보자. 

 ‘전하, 각기 가진 것을 서로 평등하게 나누면 어떠하오리까. 

 똑같이 나누도록 사람들이 자신의 자유를 조금씩만 양보하면, 

 모든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큰 자유를 누릴 것으로 사료되옵나이나이하옵소서다~’

이랬더니, 왕이 

 ‘오호, 과연 그러하오. 

 곧 나를 비롯한 왕족과 귀족들의 자유부터 제한할 터이니, 

 우리 이제 궁극적으로 모두가 자유로운 민주주의를 시작하도록 하오.’

라고 하는 식의 말도 안되는 꿈같은 무혈 혁명 선언을 한 셈이다.


음악가 바흐가 작곡을 통해 선언한 평균율이라는 무혈 혁명은, 

과학성이라는 무기를 장착하고 전세계로 급속히 퍼져나간다. 

마치 나폴레옹이 무력으로 프랑스 혁명 정신인 ‘자유, 평등, 박애’를 몰고 다닌 이후 세계의 의식이 달라진 것과도 비슷하다.

우리의 ‘민주주의’라는 심상이 조개껍질 투표하는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아닌 프랑스 혁명 이후의 민주주의로 각인되었듯이, 

근대 과학 문명이 들어간 곳엔 지구상 어디나 음악계를 바꾸어 ‘음률의 민주주의’인 평균율이 각인되었다. 

옛날 왕이나 전문 음악인을 위해 특정 조성으로 작곡된 노래도 이제 우리는 마음대로 자신의 음역에 맞추어 노래할 수 있다.

우리가 노래방에서 모든 노래를 자신의 음역에 맞게 전조해서 부르며 즐길 수 있는 것은 다 평균율 덕분인 것이다. 



평균율은 타협이다. 

원칙에 입각한 타협이다. 

옥타브를 12로 균등하게 나눈다는 원칙이 좋아서 열심히 지키려해도, 

수학적이나 물리학적인 타협이 아니라 인간적인 타협을 해야 한다.

즉 어느 순간엔 결국 귀가 음악적으로 느끼는 뉘앙스에 맞추어야 한다. 

음 간격이 수학적으로는 [1.059....]로 끝없이 이어지는 무리수의 배수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조율사가 일곱 시간이나 땀을 흘리면서 고생해야 했던 이유이다. 

타협의 접점을 찾는 것은 액정화면에 무리수를 찍어내는 튜닝 기계가 아니라 결국은 인간의 귀이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모든 것을 십진법으로 통일했다. 

그래서 ‘시간’마저도 십진법으로 바꾸었단다. 

하루는 열시간, 한시간은 백분, 일분은 백초. 

12년 후 이 체계의 실패를 인정하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단다. 

아마도  자연적 인간 정서에 너무 맞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원칙에 입각하여 양보하고 타협하는 수준은, 

결국은 인간의 귀가 좋게 느끼는 대로 조율되는 평균율의  면모처럼, 

인간의 '자연스러움'을 무너트리지 않는 경우까지만 가능하다.

타협의 평균율은 평등 그 자체를 위해서 억지를 부리며 인간 귀의 본성이나 음악성을 훼손하지 않는.




평등과 자유는 양립하기 어렵고, 한쪽을 강조하는 순간 다른 한쪽이 침해받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일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자유가 모두가 경험하는 ‘더 큰 자유’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모두가 조금씩 양보하고 타협하여 평등하기로 하면 훨씬 큰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꿈같은 명제가 사실임을, 

서양 음악에서는 평균율을 수용하고 발전시킴으로써 증명해 냈다.


인간은 ‘평등’ 자체를 인생의 목적으로 소원하거나 열망하지는 않는다. 

불평등한 것을 억울해 할 뿐이다.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자유’이다.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닌, 그 어떤 것이 앞으로 펼쳐질지 모르는 무한한 '자유'에 대한 갈망은 내 심장을 뛰게 한다. 

그러나 그 심장이 ‘진짜’라면, 그 자유를 위해서, 머리가 요청하는 평등의 원칙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3. 

‘귀벌레’ (ear-worm) 라는 말이 있다. 

한번 들은 멜로디가 계속 떠올라 하루종일 흥얼거릴 때, 

서양에서는 이 귀벌레가 노래한다고 말한다. 

내 귀벌레는 요즘 자주 노래를 부른다. 

귓속에서 내 존재의 가장자리를 자꾸 건드리면서 속삭인다. 

생각해보니 이 귀여운 귀벌레는 일생동안 내가 무얼하든 항상 평균율로 노래해 왔다.

 

그런데도 나는 평균율을 이십년 동안 미워하고 살아왔다. 

순정률 악기의 집합체인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데는 

어릴 때부터 나를 세뇌시킨 평균율의 절대음감이 너무나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 과학문명을 등에 업고 식민지로 향해 우리 고유의 음악성을 완전히 망쳐버린 서구 열강의 잔재를 마냥 좋게 볼 수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젠 '혁명과 타협'이 만들어 낸 평균율로 조율된 피아노를 보듬으며 자유를 즐기려 한다. 

이 불쌍한 평균율은 ‘평등’ 자체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한 ‘더 큰 자유’에 관심이 있었던 내 귀벌레의 멋진 친구이기 때문이다.



바닷가라는 가장자리는 바다에 비해 너무나도 작다. 

하지만 나는 그 가장자리 앉아, 

상상할 수 없이 큰 자유의 바다를 의미있게 경험한다. 


독일어에는 고향을 그리는 향수 ‘Heim-Weh’ (home-sickness)와 반대되는 

‘Fern-Weh’(far-sickness)라는 말이 있다. 

번역할 수 없는 말이다. 

먼 곳을 향한 아픔, 혹은 먼 곳에 대한 아픔... 

‘멀어서’ 모르는데 어떻게 아플 수가 있냐고 묻는 건 어리석다. 

눈이 ‘멀어도’ 아프다. 


나는 내가 모르는 더 커다란 것을 그리워한다. 

나는 이 작은 바닷가에서 ‘좋게-조율된’ 피아노를 치며 그간 외로웠던 귀벌레에게 평균율이란 먹이를 준다. 

더 큰 음악과 더 큰 세상을 다시 경험한다. 

그리고 더 큰 자유를 꿈꾼다.



구자범의 제길공명 [9] ] 한겨레  칼럼 원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