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해하지 않는 사회
궁금해 하지 않는 사회
전 세계에서 오케스트라가 가장 많은 나라는 어쩌면 우리나라일 지도 모른다.
무슨 헛소리냐고 어리둥절해 할 필요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가장 노래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란 말과 같은 맥락이기 때문이다.
전자기술이 발전하면서 제일 공들여 만들어지고 대중화된 전자악기는 ‘노래를 반주’하는 ‘가라오케’이다.
‘가라’는 한자로 ‘빌 공’(空)자이고 ‘오케’는 ‘오케스트라’를 줄인 말인데,
‘가라’에는 진짜가 아니란 뜻도 들어있으므로 가라오케는 ‘가짜 오케스트라’인 셈이다.
요즘 우리는 옛 서양 귀족인양 여흥 때 마다 웬만하면 이 오케스트라를 고용한다.
그런데 진짜 오케스트라도 원래 노래를 반주하기 위해 태어난 악기이다.
옛날 서양의 궁중에서 ‘오페라’라는 노래극을 만들어 풍류를 즐길 때,
셈여림(dynamic) 조절이 불가능한 하프시코드 같은 악기로 반주하는 것만으로는
극의 꿈틀거림을 이끌어내기 어려웠다.
그래서 현악기와 관악기를 모아 큰 ‘반주 악기’를 구성했는데,
그것이 바로 오케스트라이다.
오케스트라가 노래와 상관없이 따로 무대 위에서 연주하기 시작한 것은 한참 뒤이다.
오페라를 시작하기 전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니,
이목 집중을 위한 준비 음악으로 오케스트라만 연주하는 ‘신포니아’라 불리는 서곡을 넣었고,
나중에 이것을 독립적으로 연주하다보니 ‘심포니’(교향곡)가 생겨난 것일 뿐이다.
이렇듯 오케스트라는 진짜건 가짜건, 혹은 고전음악용이건 대중음악용이건 간에,
그 원래 목적이 사람 노래를 반주하는 것이었으니,
노래 반주를 잘하는 오케스트라가 좋은 오케스트라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오케스트라가 노래의 내용을 모르면서 반주‘만’ 잘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베토벤은 일생 동안 단 하나의 노래극만을 작곡했다.
오페라 작곡의 대가인 모차르트가 곡을 붙였던 서로 변장해서 속고 속이는 연애 이야기 따위의 코미디는,
평생 정의감에 불타고 혁명에 목 말라했던 베토벤에겐 너무 시시해서 혼을 다해 작곡할 만한 소재가 될 수 없었다.
베토벤은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신념과 인간애에 관하여 끊임없이 고민하며 소재를 찾다가,
결국 ‘피델리오’라는 대본에 곡을 붙인다.
프랑스 혁명 즈음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오페라의 내용은 이러하다.
플로레스탄은 정적(政敵)인 피차로의 비리를 고발했다가,
피차로에 의해 아무도 모르게 감옥소로 붙들려 들어와 홀로 고통을 받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감옥소가 시찰을 받게 되자,
피차로는 아예 그를 죽여서 자신의 모든 범죄를 은닉하려고 한다.
이때 플로레스탄의 부인인 레오노레가 남장을 하고 ‘피델리오’(신념, 신의란 뜻의 ‘fidelity’와 연관된)란 가명으로
간수가 되어 감옥소로 들어가 극적으로 남편을 구한다...
이렇게 줄거리를 한번만 쓱 훑어봐도 이 고집스럽고 고독했던 작곡가의 사회 참여의식 냄새가 물씬 물씬 풍긴다.
이 오페라의 2막은 감옥소 지하 독방에 갇혀 있는 플로레스탄의 아리아로 시작한다.
처음에 무겁게(grave)라는 템포의 오케스트라 전주가 나오고,
이어서 플로레스탄이 쇠사슬에 묶인 채로
“신이여, 여기는 암흑입니다!”
라고 자신과 사회의 비참함을 절규한다.
내 지휘 선생님은 이 곡을 리허설하며,
이 사람이 처한 어두운 상황과 사회적 맥락을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열심히 설명했다.
그리고 이에 공감한다면 오케스트라가 소리를 얼마나 처절하게 내야하는 지를 공들여 말했다.
이야기를 끝내고 지휘봉을 들려는데,
한 호른 주자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마에스트로, 됐구요. 그래서 메조 포르테로 내란 말예요, 아니면 포르테로 내란 말예요?”
오페라 공연을 하고 있는 오케스트라 단원이 그 극의 내용을 모른다고 하면 관객 중 믿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케스트라 단원 중 자기가 연주하고 있는 오페라의 내용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실제로 매우 드물다.
지금 연주하고 있는 부분에서 무슨 이야기가 무대 위에서 전개되는 중인지 일일이 아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다.
어떤 사람들은 오페라 공연을 다 마치고 나서도 극 중 주인공의 이름조차 모른다.
별로 궁금해 하지 않는다.
기껏 궁금한 것은 이번 연습횟수 대비 연주수당은 얼마이고, 저 주역가수의 개런티는 얼마인지 하는 것 정도란다.
한국의 한 첼로 주자의 말을 들어보니,
오페라 ‘라보엠’을 할 때, 자신의 외투를 파는 게 아쉽다고 노래하는 철학자의 아리아를 무대 밑에서 반주하며
“아, 노래가 너무 슬프다. 여자가 죽었나 봐.”
라고 단원들끼리 속삭였다고 한다.
여주인공이 죽으려면 아직 멀었는데도 말이다.
나는 이런 건 좀 너무하다 싶어서,
내가 맡았던 오케스트라가 오페라 반주를 하게 되면 반드시 미리 모여서 영화 관람하듯이 함께 동영상을 보던가,
리허설 때 오케스트라 앞에 스크린을 두고 자막을 띄워 지금 연주하는 부분의 가사를 보여주던가,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각 부분마다 일일이 내용을 설명하기도 했다.
몇 년 전, 한 오페라단에서 ‘토스카’를 공연한다며 내가 맡았던 오케스트라에게 연주를 요청한 적이 있다.
물론 지휘는 내가 아니라 다른 객원지휘자가 하는 것이었지만,
(나는 십년 넘게 독일 오페라 극장에서 지휘를 했지만,
귀국해서 오케스트라를 맡은 이후 부끄럽게도 한국의 어떤 오페라단으로부터도 지휘 요청을 받아본 적이
단 한번 도 없다)
내 연습시간을 쪼개서 다같이 오페라를 동영상으로 감상했다.
그 후 오페라단 사무실에 연락을 해서,
우리는 다른 연출의 동영상을 보았으니 연출자나 조연출자가 언제고 한 번 와서
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내용의 오페라를 이번엔 어떤 콘셉트로 연출을 하는지
오케스트라 단원에게도 알려 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절당했다.
오케스트라는 그냥 반주나 잘하면 되지, 지금 성악가 연출하기도 바쁜데 그럴 필요 없다는 것이다.
궁금해 하는 사람에게 ‘넌 몰라도 돼, 네 일이나 잘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함께’하는 일인데 모르면서 어떻게 잘할 수 있는 지 나로서는 정말 궁금할 따름이다.
성악가들은 가사를 알고 연출에 따라 연기를 하니 극의 내용을 이해하고 있지만,
무대 밑 구덩이에 파묻혀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주자는 무대 위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알 방법이 없다.
무대 위의 움직임이 보이기는커녕, 가수들의 소리조차 잘 안 들리기 때문이다.
라틴어로 오페라(opera)는 ‘노동’이란 뜻인데,
우리가 흔히 작품번호를 일컬을 때 쓰는 말인 ‘작품’(opus)의 복수형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는, 여러 작품이 노동으로 종합되려면 서로 궁금함을 미리 나누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
그런데 오케스트라의 경우, ‘스스로’ 궁금해 하며 먼저 나서기 전에는(!)
자신의 노동이 작품에서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 알 수 없다.
오페라에서 가장 많은 인원수를 차지하는 그룹임에도 불구하고,
참여는 했지만 참여한 의미는 모르는 일도 생긴다.
내가 독일 다름슈타트 극장에서 지휘했던 오페라 중에 브레히트가 대본을 쓰고 바일이 작곡한 ‘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란 작품이 있다.
가상의 자본주의 도시인 마하고니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 끝 부분엔 다음과 같은 법정 재판 장면이 나온다.
판사 : 피고가 살인을 했다고? 피해자는 어디 있소?
피고 : 피해자요? 없지요. 죽었으니까요.
판사 : 피해자가 없다고? 그럼 피해자가 ‘없’는데 가해자가 ‘있’다는 게 논리적으로 말이 되나?
피고, 무죄! 땅땅땅!
이토록 논리적으로 멋진 재판을 지켜보던 얼뜨기 자본주의 신봉자인 주인공 짐은,
자기는 기껏 술집에서 위스키 3병 값을 못 낸 죄 뿐이므로 안심하고 있다가,
바로 그 판사로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죽는다.
돈이 없어서.
술 마시고 운전했지만 음주 운전은 아닌, 그런 좋은 위스키를 마신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다름슈타트에서 코흐하임이란 사람이 이 작품을 연출했을 때는 이라크를 침공한 부쉬 대통령이 재선을 위한 선거를 앞둔 2004년도였다.
이 극 중간에는 자본주의의 황홀함에 감동한 주인공 짐이
‘돈이라면 뭐든지 해도 된다. 뺏고 싶으면 머리를 갈겨라!’
라는 모토를 연단 위에서 선포하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거기서 이 연출자가 ‘in God we trust’라고 쓰인 연단 뒤로
‘Another 4 years, www.George-W-Bush.com’
이란 현수막을 내려오게 하는 게 아닌가.
공연 후 갈채와 야유가 온통 뒤섞여 쏟아지며 난리가 났다.
하지만 극의 내용을 하나도 모르면서도 연습 내내 전혀 궁금해 하지 않고,
무대 위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런 관심 없이 그저 연주나 잘(!)했던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도대체 무슨 연유인지 알 수가 없어 어리둥절할 뿐이다.
결국 기껏 ‘우리가 연주를 잘 하긴 한 건가’를 궁금해 하며,
투덜거리면서 악기를 싸들고 집에 돌아간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몇 년 전 터키 수도 앙카라에 있는 ‘대통령(Presidential)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나에게 객원 지휘를 부탁해 왔다.
근데 연주곡이 모차르트의 레퀴엠(진혼곡)이란다.
방한하는 교황을 이단이니 마귀니 하고 부르는 기독교인도 있는 나라에서 살아 온 나로서는 덜컥할 수밖에 없다.
“아니, 이슬람 국가에서 카톨릭 노래를 연주 한다구요?
그건 북한에 가서 애국가 연주하겠다는 것만큼 심각하게 문제되는 거 아닌가요?”
라고 놀라서 묻는 나에게 그들은 웃으며
“저희는 이미 많이 연주했어요.”
라고 대답한다.
합창단을 리허설을 시작하려는데, 수석단원이
“발음은 독일식으로 할까요, 이탈리아식으로 할까요?”
라고 묻는다.
(동양의 한자를 ‘마오쩌뚱’이나 ‘모택동’ 혹은 ‘이등박문’이나 ‘이토오 히로부미’로 나라마다 다르게 발음하듯,
서양에서도 라틴어 발음을 그 작곡가의 출신 나라에 따라 정한다.
예를 들어 독일인이 쓴 진혼곡은 ‘레퀴엠’이 아니라 독일식으로 ‘레크비엠’이라고 발음한다.)
“발음도 정말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내용이잖아요.
혹시 이 라틴어 가사 무슨 뜻인지는 다들 아세요?”
라고 불안하게 묻는 나에게, 이슬람교도인 합창단원들이
“그럼요, 단어 하나하나 다 정확히 공부했어요.”
라고 이구동성으로 대답한다.
나중에 오케스트라 총무가 술자리에서 내게 말했다.
“우린 단어 뜻만 아는 게 아니라, 그 내용과 배경과 교리까지 정확히 알고 있어요.
따로 다 공부했거든요.”,
“왜요?”,
“궁금하잖아요, 좋은 노래인데.”
그들은 정말 성스럽게 노래하고 연주했다.
나도 눈물을 흘렸다.
수십 년 전 북에서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아무것도 궁금해 하지 못하는 ‘묻지 마’ 사회를 만들었을 때,
반대로 우리의 영도자께서는 ‘옆집에 오신 손님, 간첩인가 다시 보자’라는 청사에 길이 빛날 명 표어를 창안하시어 우리 모두가 서로를 ‘궁금’해 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혜안을 펼쳐 보이셨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 영도자의 적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지금의 이 시대는 궁금해 하면 안 되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언제든 대화하며 모든 궁금증을 풀어주겠다고 약속한 사람에게조차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요’라고 물어보려면,
이젠 일곱 시간이 아니라 수십 일 동안이나 자리를 뜨지 않고 굶어도 어려워졌다.
세상엔 궁금하지 않아도 되는 것도 있다.
모든 사람이 고전음악이나 현대미술에 관심가질 필요도 없고,
스포츠 구단 성적을 줄줄이 꿰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너무 많은 것을 다 궁금해 하고 별걸 다 참견하는 사람을 전문 용어로 ‘오지랖’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세상엔 반드시 궁금해야 하는 것도 있다.
음악이나 미술이나 스포츠를 필요하게 하고 가능하게 하는,
사람 사회의 근본을 이루는 것만큼은 궁금해 하는 것이 당연하다.
죽은 사람 가족에게 진혼곡을 들려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살아야 할 사람이 왜 죽었는지 정도는 같이 궁금해 하는 것이 옳다.
별로 안 궁금해도 될 성 싶은 시시콜콜한 것들은 오히려 궁금해야 된다며 연일 알려 주는 사람들이,
진짜 궁금한 것은 궁금해 하면 안 된단다.
그런데 보통 ‘궁금해 하지 마!’라고 하면 그 일이 더 궁금해지는 것이 정상 아닌가.
아니, 적어도 궁금해 하지 말라고 하는 그 이유까지 궁금해지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물론 궁금해 하지 말라는 사람들에겐 분명 내가 범접 못 할 어떤 심오한 세계가 있을 터이니,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낸들 어쩔 수 없긴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궁금해 하지 말란다고 어떻게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진짜로 싹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있는지,
이것만큼은 정말 궁금하다.
구자범의 제길공명 [4] 한겨레 칼럼 원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