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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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열의 수난을 겪은 프로그램북
합창교향곡의 연주사에 새로운 이정표가 될 지난 5월 7일 구자범지휘자의 연주에 뒤늦은 감상을 적어본다. 예술의 의미와 역할, 나아가 내가 몸담고 있는 영역에서 내 의식을 일깨워준 기회가 되었다.
1. Dioskuren, Zwillingssterne
모든 것은 한잔의 술에서 비롯되었다. 젊은 시인은 깨진 잔에 담겼던 붉은 포도주를 저 별 너머 선한 정신에게 바쳤고, 훗날 귀먼 작곡가는 그 자리에서 읊어진 시를 자신의 예술적 질료로 삼았다. 쌍둥이 별에 의지해 어두운 밤바다를 항해하는 뱃사람처럼, 시 한 구절을 등대 삼아 위대한 철학서를 음표로 저술해가기 시작했다. 곡이 완성되고도 여전한 어둠이었겠지만, 그는 핏대선 눈을 부릅뜨고 소리꾼에게는 천형과 같은 고요와 고통과 고독 속에서 초연 무대를 지휘했다. 연주의 졸렬함이라는 세간의 평가는 들으라 하니 귀를 만지는 진짜 귀머거리들의 모욕과 조롱이 담긴 배설물이었을 뿐이었다.
이백여년이 지나고 시인과 비슷한 나이의 한 철학도는 어느 날 술자리에서 지휘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새로운 여정을 출발할 결심을 했을 것이다. 가보지 못한 길을 가려는 그가 믿을 것은 음을 헤르츠단위로 구분해내는 절대음감과, 철학을 하면서 접했던 위대한 사상가들의 정신세계와, 대가의 마지막 교향곡을 언젠가 한번은 지휘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지나치게 예민한 귀를 무디게 하기 위한 훈련을 시작으로 순정률에 적응해갔고, 사람이라는 가장 불완전한 악기와 함께 음악을 하는 법을 차츰 익혔다.
예술이 안온한 일상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한 그는 마에스트로라는 달콤하고 명예로운 호칭을 슬며시 내려놓는다. 발길이 향한 곳은 함께할 것이 더 많은 곳, 그리고 엄마에게 배웠던 언어로 소통할 수 있는 곳이었다. 어울려 부대끼며, 즐기며, 슬퍼하다가 기뻐하기도 했던 그의 생각할 줄 아는 악기는 그러나 불행하게도 눈앞의 작은 이익을 위해 모자란 지도자를 청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잽싸게 떠올렸다. 마치 셰익스피어의 맥베드에 등장하는 마녀들처럼 피냄새를 맡은 하이에나 떼는 이곳에서도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무리에게 한 개인의 고통과 모든 일의 진실에 관심을 둘 이유는 없었다.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는 잊혀진 채 시간은 지났고, 그 위에 뿌려진 소금은 아물기 위해 딱지 앉는 것조차 방해했다. 그는 홀연히 바닷가로 떠났다.
뜻을 함께하고 정을 나눴던 이들은 그에게 무대로 돌아오라 이끌고 손짓했지만, 결국 그를 다시 서게 한 것은 그의 귀속에서 자리잡고 지독히 괴롭히던 귀벌레였다. 그리고 어느 날 밤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디오스쿠리 별자리를 다시 찾았다.
2. An die Freiheit
많은 예술가들이 자유를 노래했다. 사상가들은 목숨을 위협받으며 자유의 깃발을 올렸다. 어떤 이는 전장으로 향하는 자유의 여신처럼 맨몸뚱이를 던졌다. 이들이 자유의 성에 피로 반죽한 붉은 벽돌을 쌓으며 투쟁의 역사를 썼음은 틀림없지만, 어제보다 오늘의 세상이 더 자유로워졌는지, 내일이 오늘보다 더 자유로울지는 여전히 모를 일이다.
조지 오웰이 말했다. 자유는 어쩌면 누군가가 듣고 싶지 않은 것을 말하는 권리라고. 그래서 그 자유를 누리는 자, 역설적으로 가장 억압받고 고통받는다. 신도 아니면서 신의 권위를 가진 듯 판정하려는 자들과 같은 시대를 살고 있고 검열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그리고 그날의 자유를 말하기까지의 우여곡절을 생각해본다면, 여전히 이 사회는 자유를 누리려는 구성원에게 욕심이 많다고 한다. 더욱 비극적이면서 동시에 지독히도 희극적인 것은 남에게 욕심 많다 억압하는 이들이 마치 득도한 선지자인 양 자유를 입에 올리기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조금 더 자유로운 세상으로 다가갈 수 있을까?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며, 선동하던 사람들이 내놓은 해법들도 고작 다른 이의 자유를 제한하겠다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피를 대가로 한, 수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정답을 알지 못한다. 다만,‘Gott(신)’란 한 단어에 곡 전체를 종교음악이라 쉽게 판정하고 금서 다루듯 해버리는 머저리 같은 부류, 프로그램북에 검열의 잣대를 들이대던 생각없이 부지런한 자들, 무오론적 오만에 빠져 예언자와 같은 말투로 타인을 굴종시키려는 사람들이 자유의 진정한 적임을 알게 된 것은 중요한 진보임에 틀림없다.
3. Ich lebe allein meinem Liebe
철학이 과학이 밝히지 못하는 인간과 자연을 구명한다면, 신학은 절대자의 본질을 추구한다. 200년 전 한 작곡가가 물음을 던졌다. 그렇다면 예술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나는 한때 예술이 인간을 고통에서 구원해주고 혼돈에 빠진 이 사회를 밝힐 빛을 비춰주는 좋은 도구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어떤 소설가는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영혼을 인도한다는 개소리를 하는 놈은 다 죽어야 된다”는 매우 과격한 인터뷰를 한 적이 있지만, 그가 이런 말을 한 의도를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생각해보면, 소설도 그렇거니와 예술이 세상을 바꾼 적은 없다. 오히려 세상을 바꾸겠다고 설쳐대던 얼치기 이상주의자들이 아무 죄 없는 예술에 멍에를 씌울 뿐이었다. 예술이 이념의 감각적 현현이라는 것은 여전히 부정하기 힘들지만, 저 얼토당토 않은 과거의 내 믿음은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한 지금에서야 위험한 착각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러면 예술은 그저 아무런 힘이 없는 엔터테인먼트일 뿐인가?
우리는 연말이면 전례처럼 행해지는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음표 사이를 마치 환각에 취한 몽유병자처럼 방황하는 듯한 연주들도 적당히 끼워 팔리고 있다. 적당히 감동적이고 적당히 만족스럽다. 매우 편리하게도 쉽게 만들어지고 쉽게 소비됐다. 자유롭지 못한 시대에는 귀족과 권력자의 전유물이었던 예술은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산다고 착각하는 이 시대에는 현시적 소비욕구에 사로잡힌 사유없는 대중의 그럴듯한 악세사리가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렇게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의 해석들도 적당한 클리셰를 얹은 채 유희의 더 없이 훌륭한 도구가 되기도 했다.
고전적 형식을 충실히 따랐더라면, 작품에 내재하는 사해동포의 사상과, 시대와 공간을 아우르는 보편성은 언어라는 쉬운 의사소통 수단을 가진 인간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장치를 통해 주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작곡가는 혁신적인 이 작품의 마지막 악장에서 가장 쉬운 언어로 과도한 친절을 베풀었지만, 여전히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은 쉴러의 멋들어진 시 한편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외울 뿐이었다. 그딴 사상, 작곡가의 물음, 아무 관심도 없었다. 많은 이들에게 이렇게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은 쉽게 인식되었다.
예술은 세상을 바꿀 아무런 힘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를 보여줄 뿐이다. 우리는 지금 이런 모습으로 사랑하고 있고, 이런 모습으로 서로를 미워하고 있고, 이런 모습으로 하루하루 연명해 가고 있다고. 그래서 어쩌면 그저 적당하게 즐기기 좋게 조탁된 해석들도 작곡가가 의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또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니!
결국 예술에 비친 우리의 참모습을 발견한다면, 세상을 바꾸는 건 예술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이어야 한다. 그래서 예술을 감상하고 감동받고, 공감되고, 편안했다면 어쩌면 그것은 제대로 된 감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접하는 이에게 불편함을 일으키는 예술, 오히려 반성하고 발전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예술은 여전히 힘이 없지만, 예술가는 실천의 영역에서 더 이상 무기력한 존재가 아님을 증명하려는 한 사람이 있다. 내 귀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그는 200년 전을 살아가던 선배가 던진 오래된 물음에‘사랑’이라고 답하더라. 그 답에 베토벤도 저 별 너머 숭고한 정신이 되어 흐뭇하게 미소지었을 거다.
4. Frühlingstraum
합창교향곡의 연주사에 중요한 길목에 앉아있는 연주 중 어떤 것들은 주술의 영역까지 넘나든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연주들은 마치 학문에서 훈고학처럼 당대의 의미를 충실히 읽어내는 데 노력하기도 했다. 나는 주어진 악보를 해석해낼 수 없는 딜레땅트 음악애호가일 뿐이니, 어쩌면 수 많은 합창교향곡의 녹음들을 통해 이미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 그날의 감상을 적는다는 것이 과연 어떤 실익이 있을지 의심스럽지만, 음악회를 500번쯤 다니다 보면 생기는 못된 버릇은 감추기 힘들다.
스케르초에서 팀파니의 과도한 포르테는 많은 말을 낳았다. 나는 그저 나와 같은 편견에 빠져있을지 모르는 감상자들에게 이미 주어진 청각적 경험에 클리셰를 거부한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열었다는 데 눈이 번쩍 띌 뿐이었다. 음반산업이 어느 정도 표준화시켜버린 비바체, 포르테 등의 의미도 최대한 적극적으로 해석한 점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비록 상설 오케스트라가 아닌 점, 연습할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는 점은 아쉬움일 수도 있지만, 기술적 완성도가 연주회의 목적이었다면 다른 접근법이 있었음은 당연할 것이다.
아다지오에서는 도도한 낭만이 물결처럼 넘실거렸다. 몇 년전 어느 TV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은 그녀의 낭만을 독일제 총구안에 숨겨두고 있다고 했지만, 독일인이 악보에 숨겨놓은 낭만은 그날 밤 몸집이 작은 한국인의 지휘봉 끝에서 그 어떤 것도 숨기지 못했다. 모든 순간순간이, 심지어 휴지부조차도 칸타빌레였다.
4악장 해석은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궁금해했음은 자명하다. 독일어의 음률에 맞춘 작품이 언어체계가 완전히 다른 우리말로 불릴 수 있는 것인지, 과연 그 번역이 시와 곡의 원작자의 의도를 충분히 살릴 수 있을 것인지 기대와 의심을 동시에 가졌을 것이다. 비록 알라 마르시아 도입부가 미리 우려한 것과 같이 박수소리에 소실되어 버린 점, 후반부의 앙상블 꼬임으로 연주가 잠시 중단된 점이 적지 않은 아쉬움임이다. 그러나 기악적으로 페스티발 오케스트라의 한계를 상당 부분 극복했고, 우리말로 번역된 덕에 합창단이 작품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고 임한 것은 연주의 수준에 기여했다고 본다. 무엇보다도 백미였던 코다에서의 계산된 불협화음과 그 폭풍 같았던 질주는 이전의 모든 연주와 완전히 구별되는 새로운 해석이었다.
5. Grün des Lebens goldner Baum
찬란하게 아름다웠던 오월이 어느덧 그 마지막을 향한다. 그중 어떤 날 광화문에서는 여느 때처럼 정열이 분열이 되어 끓어올랐고, 금남로에서는 40여 전의 아픈 기억이 소환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월의 한날 인간이 자유의 이상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고난의 여정을 시공간적으로 구성해서 무대 위에 소환하는 작업을 목격했다는 것은 나를 더 성찰하게 한 오월의 특별한 경험이었다.
예술은 아름다움 자체가 아니라, 생명력을 가지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현실세계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학문도 마찬가지로 관념적 지식의 타성적 습득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를 인식하고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어떠했던가. 수동적으로 학문세계에 오래 몸담으며 현실인식에 소홀했던 나는 그 연주회 이후 불편함을 느꼈다. 그래서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오직 푸르른 것은 저 생명의 황금나무일 뿐이라는 악마의 속삭임은 비록 유혹의 수사라 할지라도 나를 반성케 한다.
나 또한 얼치기 이상주의자일지도 모르지만,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덤비던 무모한 이들과는 다르게 다행스럽게도 아직 자기확신을 갖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 언젠가 이상이 실현될 수 있는 길을 발견할지도 모르고, 내가 더 무모해질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늘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혀 있음에도 내 의식과 무의식은 바른 길을 알고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본다.
[출처] 우리말로 부르는 베토벤 교향곡 9번 '자유의 송가' 감상|작성자 Youngja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