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9번 '자유의 송가' 우리말 번역
왜 ‘기쁨’이 아니라 ‘자유’인가
독일이 통일되었을 때,
지휘자 번스타인은 베를린에서 ‘환희(기쁨)의 송가’를 ‘자유의 송가’란 제목으로 연주했다.
당시 나는 번스타인이 행사취지에 맞게 자의적으로 단어를 바꾸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유태계 미국인이 임의로 제안한 단어를 그 많은 독일인들이 받아들여 노래했는지는 의문이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원래 시가 ‘자유의 송가’였고,
번스타인이 함부로 원곡을 훼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원뜻을 살려 제대로 연주한 것이란 걸 알게 되었다.
쉴러는 이 ‘기쁨의 송가’를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4년 전인 1785년에 썼다.
1759년생인 쉴러가 26살의 피끓는 젊은 나이에 쓴 것이다.
쉴러는 친구들과 포도주를 마시다가 잔이 깨지자,
마치 우리가 술을 땅에 뿌리는 ‘고수레’를 하듯,
장난처럼 ‘이 잔은 저 별 너머에 계신 선한 정신에게!’라고 외치고는 이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7연)
Dieses Glas dem guten Geist, 이 잔을 선한 정신에게,
überm Sternenzelt dort oben! 저 별 너머 하늘 위에 계신!
포도주의 아름다운 빛, 그리고 그 불에 취함.
이렇게 포도주로 시작한 은유는 곧 윤리적,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를 담는 9연의 방대한 시로 변모했다.
그런데 쉴러의 시 전체를 찬찬히 살펴보면,
‘도대체 이 문장들이 어떻게 기쁨과 관련을 맺는다는 거지?’
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1연의 ‘기쁨이 모든 인간들을 형제로 묶어낸다’라는 발상도 이상하거니와,
4연의 ‘기쁨을 위해 기쁘게 달리라’는 이해 못할 논리도 보인다.
게다가 8연의 ‘이것은 선(善)과 피(血)에 관한 문제이니, 맹세하고, 친구와 적을 가르고, 싸우자’쯤 되면,
‘기쁨’이란 말이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그 기쁨일 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기쁨이란 말을 ‘자유’로 치환하여 보면 모든 의문이 풀린다.
쉴러가 원래 자유를 염두에 두고 썼던 것이기 때문이다.
기쁨(Freude)은 자유(Freiheit)였다.
- 다른 작곡가들의 ‘An die Freude’
사실 베토벤이 9번 교향곡을 쓴 1824년 이전에도 이 시에 노래를 붙인 사람은 매우 많이 있었다.
지금은 프랑스 국가가 된 혁명군가인 ‘라 마르세이예즈’와 첫 부분이 비슷하게 시작하는 노래들도 여럿 있었다.
(위 두 노래는 작곡 연대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가사를 자세히 보면,
‘모든 사람이 형제되는 -Alle Mensche werden Brüder’이 아닌,
쉴러의 초판본 그대로 ‘거지가 왕의 형제되는 -Bettler werden Fürstenbrüder’으로 되어있으므로,
당연히 베토벤의 교향곡보다 훨씬 먼저 작곡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베토벤보다 27살이나 젊은 슈베르트도 베토벤보다 9년 먼저,
즉 18세 나이인 1815년에 이미 이 시에 노래를 붙였다.
(이 후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일단 여기서 위의 곡들이 8행은 메기고 4행은 합창단(Chor)이 받는 구조로 되어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자.
작곡가들은 이 두 부분을 완전히 다른 형식으로 작곡하였다.
슈베르트 곡의 경우 앞부분은 2/2 뒷부분은 3/4으로, 다른 박자와 다른 템포로 되어있다.)
이 작곡가들은 시에 직접 노래를 붙인 것이지,
베토벤처럼 시나리오를 구성하여 극음악화한 것이 아니다.
악보에서 보다시피, 이들은 마치 우리가 애국가나 찬송가를 부르듯,
각 절로 반복해서 모든 연을 노래했다.
또 그렇다고 실제로 모든 연을 곡에 붙인 것도 아니다.
슈베르트의 악보에서 볼 수 있듯, 8연까지만 붙였다.
핵심부라 할 수 있는 9연은 차마 붙이지 못했다.
모든 시에서 가장 중요한 연은 당연히 처음과 마지막이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그러나 슈베르트를 비롯한 모든 작곡가들은 마지막 연인 9연을 노래할 수 없었다.
당시에는 너무나도 과격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9연]
Rettung von Tyrannenketten, 폭군의 사슬에서 해방을,
Großmut auch dem Bösewicht, 악당에게도 관용을,
Hoffnung auf den Sterbebetten, 임종의 침상에 희망을,
Gnade auf dem Hochgericht! 사형대 위에 자비를!
Auch die Toten sollen leben! 죽은자조차 살아야한다!
Brüder, trinkt und stimmet ein, 벗들이여, 마시고 동의하라,
Allen Sündern soll vergeben, 모든 죄인은 용서받을지니,
Und die Hölle nicht mehr sein. 그러면 더이상 지옥은 없으리라.
아,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죄인’으로 몰려 죽어갔단 말인가.
어쩌다 이 땅이 지옥 그 자체가 되었단 말인가.
이 피눈물나는 마지막 연을 보면서도
“쉴러는 ‘기쁨’을 찬양하는 노래를 쓴 것이지 ‘자유’를 노래한 것이 아니다”라고 우길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유일하게 마지막 연을 포함한 곡이 있긴 하다.
‘단치’가 작곡한 곡이다.
하지만 악보를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듯이, 9연의 가사가 다르다.
폭군의 사슬(Tyrannenketten)이란 말이 감옥의 사슬(Kerkersketten)로 바뀌어 있다.
그 누구에게도 ‘폭군으로부터 해방’이란 말은 무리였다.
‘폭군으로부터 해방’이란 말을 쓴다는 것은 전제정 아래 ‘백성’들에겐 역모를 꾀하는 반역자와 같았을 터이고,
‘지옥은 없다’란 말을 한다는 것은 종교재판에 회부될 각오를 한 신성 모독자와 같았을 터이다.
아무리 ‘해방’과 ‘자유’는 다른 개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왕 입장에선 똑같이 보였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100여년 전 조선 왕조시대에 ‘민주주의’를 하자고 외치는 사람이 있었다면,
의금부에 끌려가기도 전에 동네 어귀에서 역적이라고 멍석말이 당해 맞아 죽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대놓고 ‘자유의 송가(Ode an die Freiheit)’를 쓴 시인도 있긴 하다.
문인들에겐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로 시작하는 시로,
음악인들에겐 ‘예브게니 오녜긴’이란 오페라로 잘 알려진 푸쉬킨이다.
물론 짐작대로,
그는 젊은 시절 이 ‘자유의 송가’를 제정 러시아에서 발표하고 곧 추방, 망명 등 어마어마한 고초를 겪었다.
심지어 베토벤의 9번 교향곡 초연 다음해인 1825년,
입헌군주제를 주창하는 데카브리스트 봉기 혁명군의 소지품에서 그의 시 ‘자유의 송가’가 발견되자,
당국은 푸쉬킨을 다시 당장 모스크바로 소환했다.
그렇다면,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훨씬 전인 혹독한 시절에 시를 썼던 쉴러의 입장에서,
이 시의 중요한 첫 연만큼이라도 누구나 읊고 부를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다른 단어를 써서 ‘자유’라는 말로 알아듣게 하는 것이었다.
알아들을 자는 알아듣는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던 시대에 살던 예수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라고 하니, 자신의 귀를 만져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귀가 없는 사람이다.
베토벤도 전제정 시대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50이 넘어서 이토록 자유를 갈망하는 곡을 썼지만,
막상 이 곡을 발표할 때는 자신과 동갑내기인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에게 헌정하며,
북에서 위대하신 수령님을 찬양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다음과 같은 표지로 출판해야 했다.
보다시피, 제목을 비롯한 음악에 관한 그 어떤 단어보다도, 왕의 커다란 이름이 표지를 가득 채우고 있다.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전하께 루드비히 판 베토벤이 깊은 충심으로 헌정하옵나이다.”
우리는 지금 아무나(!) 자유라는 말을 쉽게 내뱉고 사는 하수상한 시절을 지내다 보니,
‘자유란 말을 하는 것 쯤이 뭐가 그리 어렵다고...’ 라고 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자유’란 말을 ‘자유롭게’하기까지의 가시밭길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 혁명정신과 베토벤
베토벤이 젊은 시절에 처음 봤던 쉴러의 초판본 제 1연은 다음과 같았다.
[초판본 1연]
Deine Zauber binden wieder, 통념의 칼이 갈라놓은 것을
was der Mode Schwerd getheilt; 그대 마법들이 다시 묶으리니,
Bettler werden Fürstenbrüder, 당신의 부드러운 날개가 머무는 곳에서
wo dein sanfter Flügel weilt. 거지가 왕의 형제 되리이다.
‘거지가 왕의 형제 되리라’란 말처럼 평등과 형제애를 한 번에 표현할 수 있는 말이 또 있을까.
자유의 날개 아래,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여기서 쉴러의 자유라 함은,
곧 ‘평등과 형제애를 포함하는 총체적 혁명정신으로서의 자유’임을 알 수 있다.
쉴러는 8연에서 이미 대놓고 혁명정신을 말하고 있었다.
[8연]
Festen Mut in schwerem Leiden, 극심한 고난 속에 굳센 용기를,
Hülfe, wo die Unschuld weint, 억울한 이들이 우는 곳에 도움을,
Ewigkeit geschwornen Eiden, 맹세한 서약의 영원함을,
Wahrheit gegen Freund und Feind, 누가 친구이고 적인가에 대한 진실을,
Männerstolz vor Königsthronen – 왕좌 앞에서 인간의 자존심
Brüder, gält es Gut und Blut, – 형제여, 이건 선과 피에 관한 것이다.
Dem Verdienste seine Kronen, 참으로 받을 자격있는 자에게 왕관을,
Untergang der Lügenbrut! 거짓인 자에게는 몰락을!
젊은 시절 이 시에 크게 감동을 받은 베토벤은 시간이 지나도 이 정신을 잊지 않았다.
후에 나폴레옹이 이 혁명정신을 몰고 왔을 때에도,
많은 지성인들과 마찬가지로 베토벤 역시 그 혁명정신을 지지했다.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의 관을 썼다는 것에는 악보 표지를 찢을 만큼 매우 분노했지만,
그가 만든 법과, 그가 전파한 혁명정신에는 동의하였다.
지금이야 법이란 말이 강자에게 유리하고 약자에게 불리한 것으로 들리는 시대가 되었지만,맨 처음 법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선한 정신의 발로였다.
고조선의 8조 금법도, 심지어 함무라비 법전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법도,
사실상 노예가 주인 아들의 이를 다치게 했다하더라도, 함부로 죽이지는 말고 똑같이 이만 다치게 하라는 선한 정신의 발로였을 것이다.
법이 없는 상황, 절대 군주의 한마디로 모든 것이 결정나던 시대에서, 법의 제정은 매우 커다란 진보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법철학을 쓴 헤겔같은 철학자도 자기가 사는 도시 예나에 나폴레옹이 입성하였을 때,
그를 ‘세계 혼(Weltseele)’이라 부르며 경외심으로 바라보았다.
우리가 잘 아는 오페라 ‘토스카’에서도,
이탈리아인 화가 카바라도씨가 로마 왕정에서 고문을 받다가 나폴레옹이 로마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자,
‘만세, 만세(Vittoria)!’를 외치는 장면이 나온다.
이토오 히로부미가 입성하니 만세를 부르는 놈이 있다면 매국노도 그런 매국노가 없으리라.자국이 침략 당했는데 만세를 부르다니, 이런 역적이 어디있는가.
하지만 지금도 이탈리아에서는, 이탈리아 사람인 푸치니가 작곡하고 이탈리아 테너가 노래하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이탈리아 관객 모두가 카바라도씨 편이 되어 그의 소리에 ‘브라보’를 외쳐댄다.
이렇듯, 이 혁명정신은 국가와 민족을 넘어선 ‘세계 시민’에 관한 것이고 ‘인간 보편’에 관한 것이었다.
베토벤은 나이를 먹어도 그 정신을 잊지 않고 지지하며 자유를 열망했다.
그러다가 50세가 넘어서 가장 기품있는 방식으로,
젊은 시절 감동을 받은 쉴러의 시를 각색해 작곡함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고백하기에 이른다.
왜 하필 이 때일까.
베토벤이 작곡하기로 마음 먹은 것은,
나폴레옹 실각후 비인체제와 메테르니히를 거쳐 유럽사회가 다시 보수 반동세력에 의해 완전히 혁명 이전으로 후퇴하고 있을 때였다.
베토벤은 이 혁명정신이 소멸하는 세상의 퇴보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펜을 꺼내 든 것이리라.
쉴러 시의 구조
쉴러의 시는 총 9연으로, 각 연은 8행의 메기는 소리와 4행의 받는 소리로 구성되었다.
쉴러는 4행의 받는 소리에 특별히 ‘합창단(Chor)’이라고 표시해 두었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 비극의 전통에 따른 것이다.
그리스의 합창단은 극 중에서 배우와 관객이 아닌 제 3자의 시점을 가진 중간자로,
신의 목소리로부터 일반 대중의 탄식까지, 여러 불특정한 역할을 맡았다.
즉, 앞 8행의 화자와 뒤 4행의 화자는 다르다.
1연의 합창단 부분 가사 첫 두줄은 이러하다.
Seid umschlungen, Millionen!
Diesen Kuß der ganzen Welt!
-영어 직역
Be embraced, million!
This kiss to the whole world!
- 우리말 직역
(내게) 안기어라, 백만인들아!
이 입맞춤을 전 세계에 (주노라)!
그러나 인터넷상에 흔히 돌아다니는 번역물들을 보면,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있다.
서로 껴안아라! 만인이여
전 세계의 입맞춤을 받으라! - (나무위키)
모든 사람은 서로 포옹하라!
이것은 온 세상을 위한 입맞춤! - (위키백과)
심지어 이런 번역도 있다.
포옹하라! 만민들이여!
온 세상에 키스를 주라! - (모 블로그)
이런 오역들은 화자가 바뀌었다는 것을 몰라서 생긴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계속 한 사람이 이어 말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문맥이 이상했을 터라,
‘안겨라!(be embraced)’와 같이 중학생도 할 수 있는 단순한 수동태의 번역도,
‘서로 껴안아라!(embrace each other)’라는 능동태로 상상해서 번역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화자가 다르다!
쉴러의 시에서 앞 8행의 화자는 인간이고, 뒤 4행의 화자는 신적인 존재(여기서는 자유)이다.
그래서 위의 악보들에서 보았듯이,
슈베르트를 비롯한 독일의 작곡가들은 다른 박자와 다른 템포로 합창부분을 작곡했던 것이다.
- 베토벤이 바꾼 구조
베토벤은 쉴러의 원래 시 구조를 뒤엎는다.
그의 밑그림은 훨씬 더 원대했다.
위 시에서 볼드체로 표시한 부분만 따오고, 번호의 순서대로 재구성한다.
원래 쉴러의 시 첫 연을, 각운 때문에 생긴 도치를 무시하고 평서문으로 직역하면 이러하다.
(인간)
자유,
아름다운 신들의 빛이여! (Schöner Götterfunken)
낙원의 딸이여! (Tochter aus Elysium)
하늘님이시여! (Himmlische)
우리는 불에 취해 그대의 성소로 들어가나이다.
세상의 통념이 모질게 갈라놓은 것들을
그대의 마법들이 다시 묶으리니,
그대의 부드러운 날개가 머무는 곳에서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리이다.
(자유)
내게 안기어라, 만민들아!
전 세계에 이 입맞춤을 주노라!
너흰 형제다! 저 별 너머에
좋으신 아버지가 분명히 살고 계시리니.
즉, 쉴러의 시에서는 인간이 자유를 향하여 소망을 말하면,
자유는 곧바로 나타나 그 소원을 들어주며, 그 한 연에서 사건이 완결된다.
그러나 베토벤은 오랜 시간에 걸쳐 감정선이 움직일 수 있도록, 매우 정교한 시나리오를 구상했다.
한 연 안에서 모든 것이 완성되고 끝나는 것이 아닌, 긴 감정선을 계획한 것이다.
공간에서는 압도적인 것을 보았을 때, 찰나의 순간에도 숭고를 느낄 수 있지만,
시간에서 숭고를 느끼기 위해선 충분히 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가 택한 방법은 놀랍게도,
1연의 후반 4행(합창단 부분)을 한참 뒤로 미뤄, 곡 후반에 나타나게 하는 것이었다.
즉, 부르자마자 곧바로 응답하는 자유의 신이 아니라,
온갖 고초와 투쟁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응답하는 자유의 신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마법이 일어나는 입맞춤은 자유를 향한 투쟁이 끝나고 승리한 뒤에 상으로 받게 되는 것으로 스토리라인을 만들었다.
‘모든 사람이 자유의 날개 아래 형제가 되는 것은, 결코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다’라는 것이 그의 고백이고,
바로 이 시나리오의 핵심이다.
베토벤의 교향곡 전체 시나리오
만일 공간 예술에서 그 공간 외에 다른 물리적 공간이 인지된다면, 그건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가 영화를 보는데, 스크린 밖에 있는 비상구 표지판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면, 그건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반대로 시간 예술에서 물리적 시간이 인지된다면, 그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아름다운 멜로디를 들으며 몇분 몇초가 지나고 있다고 느낀다면, 또한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공간예술에서 시간을 느낀다면,
즉 회화나 조각에서 시간의 흐름이나 깊이를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훌륭하다.
또한 시간예술에서 공간을 느낀다면,
즉 음악에서 운동이나, 상황, 표정 등을 느낄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훌륭하다.
베토벤은 쉴러의 시를 각색하고 시나리오를 구성하여,
마치 우리가 어떤 공간 속에서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만들어 주었고,
공간 자체가 이동하는 느낌도 만들어 주었다.
단락 별로 급작스럽게 완전히 끊기는 휴지부에서,
우리는 베토벤을 따라 공간 이동을 한다.
4박 계열의 음악에서 3박 계열의 음악으로의 급작스런 변화를 통해,
이곳에서 저곳으로, 심지어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그러면서도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모호한 경계를 설정해,
우리가 음악으로 참여한 시공간이, 현실이 아닌 예술임을 끝까지 알 수 있게 해 두었다.
- 극적(劇的) 구조
일단, 베토벤은 전통적 교향곡의 형식인 느린 2악장과 빠른 3악장의 위치를 서로 바꾸었다.
이것은 극음악인 오페라의 전통을 따른 것으로, 기승전결 구조의 극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함이다.
그 당시 오페라의 전통적 구조는 다음과 같았다.
서곡 후 1막이 시작하면 각 등장인물들이 하나씩 등장해, 갈등을 키워나간다.
1막 피날레에서 점점 빨라지고 모든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며 막을 내린다.
궁금증이 가장 증폭된 상태로 휴식을 갖는다.
다시 2막을 조용히 시작하여 점차 반전을 경험하고, 2막 피날레에서 매우 빨라졌다가, 갑자기 매우 느린 장면(흔히 Deus ex Machina라고 일컫는)으로 갈등을 일순간에 해결한다.
그리고 다시 매우 빠른 장면을 덧붙여, 갈등을 해결해 준 신이나 왕을 찬양하며 막을 내린다.
베토벤은 이 교향곡을 극음악처럼 만들기 위하여,
오페라의 전통방식을 따라 악장의 순서를 바꾸었다.
그래서 가장 빠른 2악장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싹둑 끊어 1막을 내려버리고,
느린 3악장으로 다시 2막을 시작해 4악장의 피날레로 가는 ‘극적인(dramatic)’ 방식을 택한 것이다.
- 음악적 구조
(음악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이 단락을 건너뛰어도 아무런 문제없다)
만약 이 교향곡에 가사가 들어가 있지 않다고 가정하고 전체 시나리오에 음악적으로 부제를 붙인다면,
아마도 “F음정을 극복하고 F#음정으로 서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베토벤은 F 음정을 마치 자유가 결여된 세계의 폭력으로 상정하고,
그 음정을 이기고 F# 음정이 되기까지 끝없이 추구하는 과정을 음악으로 그려내었다.
(자유와 기쁨이 둘다 ‘Fr’로 시작하는 단어인데, 왜 폭력이 하필 F 음정이냐고 질문한다면,
검증될 순 없지만 다음과 같이 조심스레 추측해볼 수는 있다.
첫째, F = m a 공식에서처럼 F는 원래 힘을 나타낸다.
둘째, 베토벤이 살던 프로이센의 왕은 ‘Fridrich Willhelm 3세’였고,
그 전 왕들도 프리드리히 대왕을 비롯, 모두가 다 프리드리히였다.
어떤 작곡가가 만일 조선 시대에 ‘이’씨 왕조의 폭정을 비밀리에 표현하려고 했다면,
혹시 E 음정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1악장 :
d단조. D음정과 A음정 사이의 빈공간에 F음정이 들어온다.
F음정이 지배하는 곳에서 F#음정이 꿈틀거리며 일어서려한다.
높은 윗 음정 F#에 도달할 듯, 도달할 듯하다가 결국 도달하지 못하고 좌절한다.
장송곡이 울려 퍼지고 분노가 끓어오르며 끝을 맺는다.
2악장 :
여기선 아예 F 음정을 팀파니가 독점하며, 폭압한다.
악기들이 각자의 목소리를 조그맣게 낼 때는 참고 있다가,
모여서 큰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여지없이 달려들어 F 음정을 두들긴다.
마치 두더지 잡기 게임을 하듯.
그런데 막다른 골목으로 점점 빨라지도록 몰아가서,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을 때, 놀랍게도 ‘베이스 트롬본’이 마치 수호천사처럼 나팔 소리를 울리며 폭력을 막아서고, ‘트리오’ 부분으로 넘어간다.
이 트리오는 D장조로, 마치 소도에 도피한 사람들처럼 모두가 차분하고 행복한 느낌으로 자연스럽게 F#으로 노래한다.
하지만 오보에 솔로가 슬슬 삐딱선을 타기 시작하며 ‘F’장조로 넘어가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그러면 그 순간 여지없이 또 수호천사의 나팔이 막아서며 다시 D장조로 되돌려 놓는다.
모든 트롬본의 응원을 받으며 다시 현실인 d단조로 돌아간다.
그러나 다시 반복!
결국 처음처럼 팀파니의 폭압을 똑같이 다시 경험하며 1막을 내린다.
3악장 :
아예 B플랫 장조로,
F음정이 폭력적이지 않고 부드러운, 자유로운, 꿈같은 세계이다.
여기서는 베이스의 F음정도 자신이 ‘F’라는 것을 아주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아포자투라(걸친 음)으로 알려주고 같이 어울린다.
바이올린의 자유의 물결이 점점 더 자유로워진다.
4악장 :
꿈을 깨보니 F음정이 지배하는 d단조, 지옥같은 현실이다.
베토벤은 F#음정이 들어간 멜로디로 D장조를 천천히 키워나간다.
힘겨운 투쟁 후 승리를 하니, 2악장에서 수호천사처럼 등장했던 베이스 트롬본의 나팔 소리가 울린다.
그와 함께 F음정은 아예 존재할 수 없는 G장조로, 현실 세계와 구분되는 3박 계열의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다시 4박 계열 D장조 현세계로 돌아오며,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모호할 때,
오페라처럼 마지막 직전에 ‘Deus ex Machina’ 전통을 따르며 갑자기 느려졌다가,
다시 최고조로 빨라져 끝을 맺는다.
베토벤은 이 4악장을 오라토리오 형식으로 채워나간다.
오라토리오 형식으로서의 4악장
베토벤은 4악장에 사람의 소리를 넣으며, 오라토리오 형식을 따랐다.
이전의 그 어떤 교향곡도 한 악장 속에서 이토록 변화 무쌍하게 조성과 박자가 바뀐 경우는 없었다.
게다가 그 변화의 순간마다, 자연스럽게 잇지 않고 도끼로 찍어 잘라내듯 단락을 구분지은 교향곡은 없었다.
이것은 오라토리오와 같은 극음악만이 지니는 구조인 것이다.
작곡가 입장에서 오페라와 오라토리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오페라는 대본대로 작곡을 해야 하지만,
오라토리오는 대본을 작곡가가 구성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오라토리오에는 작곡가가 자신의 고백을 직접 집어 넣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바흐의 오라토리오를 예시로 설명하겠다.
단 하나의 오페라 (정확히는 징슈필)인 피델리오를 작곡하고 완전히 환멸을 느낀 베토벤은,
자신의 사상과 정신성을 쏟아부을 수 있는 텍스트를 찾았고,
오라토리오 형식을 통해 그 텍스트를 재구성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신념을 고백한 것이다.
연주자 입장에서 오라토리오와 오페라의 가장 큰 차이는 캐릭터,
즉 등장인물의 설정이다.
오페라는 1인당 하나의 역을 맡지만, 오라토리오는 1인이 다역을 맡는다.
오페라의 합창단은 각자 역을 맡은 캐릭터들의 집합체이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 청년과 노인 등이 구분되는 소리를 낸다.
그러나 오라토리오는 캐릭터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단일체이다.
그래서 오라토리오 합창단은 중성에 가까운 이른바 보편인간의 소리를 낸다.
- 오라토리오의 복잡한 특징
인간이 만든 최고의 오라토리오인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예로 들어보자.
이 오라토리오는 마치 액자 연극처럼 구성되어 있다.
요즘 식으로 비유하자면,
우리나라 드라마를 보며 리액션하는 외국인들의 모습을 찍어 놓은 유튜브 동영상 같은 것이다.
남녀가 같이 드라마를 보는데,
남자는 드라마를 보다가 슈퍼카가 나오는 장면에서 스톱 버튼을 누르고 리액션을 하고,
여자는 명품가방이 나오는 부분에서 스톱 버튼을 누르고 리액션을 하는 것을 보여주는 셈이다.
오라토리오는 이 드라마 동영상과 리액션 동영상을 동시에 같은 공간에서 보여준다.
마태수난곡에선 예수의 수난 사건이 드라마 동영상처럼 펼쳐지고,
그것을 지켜보던 솔리스트와 합창단이 바흐가 고백하고 싶은 부분에서 끼어들어 노래한다.
바흐의 고백은 5개의 다중인격으로 드러난다.
소프라노를 통한 연인으로서의 성격, 알토를 통한 어머니로서의 성격, 테너를 통한 동지로서의 성격, 베이스를 통한 아버지로서의 성격, 그리고 합창단을 통한 동시대 기독교인으로서의 성격.
이 모든 성격이 바흐 자신인 것이다!
이러한 것은 오라토리오에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실제로 사람은 누구의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남편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아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라토리오의 극 전개는, 조금 거칠게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누가 복음에 의하면) 빌라도가 ‘이 자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 나는 그에게서 아무런 죄를 발견하지 못하였다’라고 하는 장면에서,
마태 수난곡의 소프라노 가수는 ‘이 자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 까지만 듣고,
갑자기 스톱버튼을 누른 후, 자신의 감정을 노래로 한참동안 고백한다.
‘그러게 말이에요, 도대체 그가 무슨 잘못을 했나요, 그는 선한 일을 한 것 밖에 없어요... 사랑하신 죄로 내 구세주가 돌아가시네.’라고.
그 엄청 긴 노래가 끝나고 다시 플레이 버튼이 눌려지면,
합창단은 갑자기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고 외치고,
빌라도는 손을 씻으며 ‘나는 죄를 발견 못했고, 이 피에 책임이 없으니, 니들이 책임져라’라고 말한다.
소프라노가 노래하느라 물리적 시간이 한참 지났기 때문에,
이런 구성을 모르는 사람들에겐 합창단과 빌라도의 이런 말이 너무 뜬금없이 느껴진다.
또 좀 전 소프라노로 노래한 여자가 당시대 등장인물인지, 현시대의 관찰자인지,
어떤 극이 어떤 극이고, 어떤 흐름이 어떤 흐름인지 헷갈리기 일쑤다.
합창단의 경우는 더욱 혼란스럽다.
전체 내용과 구조를 알기 전에는 캐릭터 구분이 어렵기 때문이다.
합창단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라고 외치고는,
불과 몇초 뒤 갑자기 정색을 하고 ‘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형벌인가!’라고 찬송을 하니,
정말, 이 얼마나 사이코 드라마 같은가.
다시 말하지만, 오라토리오 합창단은 알토와 테너의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남녀의 소리의 색깔을 구분하지 않고,
오로지 음높이 (주파수 크기)로만 화성을 이루는 이른바 보편인간의 합창이다.
또한 극에서의 역할이 다양한 다중인격체이다.
그래서 오페라 합창단과 달리,
다중 역할을 하는 오라토리오의 합창단은 각 노래마다 그 화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심지어는 한 노래 내에서 어느 부분이 어떤 화자인지 알아야 한다.
베토벤이 선택한 4악장의 시나리오는 오페라 방식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오라토리오 방식이다.
그러니 합창단도 오라토리오 합창단의 전통을 따른다.
합창단이 노래하지만, 쉴러가 원시에 ‘합창단’이라고 표기한 후반 4행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종횡무진 모든 역을 다 노래한다.
예를 들어, 자유의 목소리인 신적인 역할로 ‘무릎 꿇고 귀 기울이라, 들리는가 저 큰 뜻?’이라고 노래하고는,
조금 후에 인간의 역할로 ‘무릎 꿇고 귀 기울이라, 들리는가 저 큰 뜻?’이라고 똑같은 가사를 다른 뉘앙스로 노래한다.
물론 가사만 같을 뿐, 의미는 전혀 다르다.
베토벤이 음악으로 들려주는 시나리오에 따르면,
첫번째 문장은 ‘의심하는 자여, 믿으라!’는 뜻이고,
두번째 문장은 ‘의심이 풀렸어, 믿을래!’라는 뜻이다.
심지어, 자유가 ‘나의 품에 안기어라’와 인간이 ‘자유, 삶의 참 빛이여!’ 를 동시에 노래할 때는, 아예 한 프레이즈마다 자유와 인간의 역할을 바꾸어 노래하기도 한다.
이렇게 오라토리오의 가수와 합창단은 분장도 의상도 특별한 소리 색깔도 없이 변화무쌍하게 변신한다.
이것이 바로 오라토리오 형식으로 된 시나리오를 이해해야 하는 이유이다.
(이렇게 구조가 복잡하고 정신없는 걸 그 당시 독일 사람들은 어떻게 알아들었을까,
하는 질문이 나올 법도 하다.
답은, 우리의 판소리를 생각해 보면 간단하다.
판소리에서는 단 한 명이 모든 등장인물을 노래한다.
그러나 우리는 스토리 라인을 따라가며 듣고, 아무런 문제 없이 이해한다.)
번역
번역은 매우 어렵다.
특히 음정에 맞추어 노래 가사를 번역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번역하다가 잘못하면 원본의 뜻을 훼손할 위험도 많다.
그러나 루터의 성경번역이 세계를 완전히 바꾼 것처럼,
번역은 큰 힘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문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내가,
굳이 이 어려운 번역 작업을 시도하게 된 이유는,
시중에 떠도는 9번 교향곡의 번역본에 너무나 오역이 많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오역이 많았던 이유는 다음에서 기인한다.
첫째, 시 안에서 화자가 변한다는 것을 몰랐다는 점
둘째, 베토벤이 시를 분해해서 시나리오로 각색했다는 것을 간과했다는 점
셋째, 시의 행간에 대한 정보가 너무 적었다는 점
그러다 보니, 기승전결의 스토리 라인을 살리지 못하게 된 것이다.
베토벤의 스토리 라인을 따라가다 보면, 같은 단어가 반복된다 하더라도,
화자와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뉘앙스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은 음악가들의 감각이다.
예를 들어 똑같은 형제(Brüder)란 말이
‘부르는 말’인 호격으로 쓰인 건지, 아니면 ‘서술하는 말’인 보격으로 쓰인 건지,
그 때 그 때 음악에 따라서, 즉 그 음 높이와 길이와 음색과 맥락에 따라서,
음악가들은 즉각적으로 알 수 있다.
작곡가가 작곡한 음악의 심상으로 아는 것이다.
그러니 음악 가사의 번역은 같은 심상, 같은 뉘앙스를 떠올릴 수 있게 하느냐가 관건이다.
하지만 서양어의 심상과 우리말의 심상은 다르다.
데카르트가 그의 ‘음악론’ 첫 문장을 ‘음악의 대상은 음이다’라고 썼을 때,
우리에겐 ‘이런 당연한 말을 굳이 쓸 필요가 있나?’ 싶을 만큼 동어반복처럼 들리지만,
그에게는 다른 심상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말 ‘音樂’과 달리 ‘Musica’라는 라틴어에는 말 자체에 정말 ‘音’이란 심상이 없다.
무언가 황홀한 뮤즈라는 여신의 심상만 있을 뿐.
영어로 간단히 생각해봐도, 심상 차이는 크게 날 수 밖에 없다.
음악(music)엔 음이 없다. 천국(heaven)엔 하늘이 없고, 지옥(hell)엔 땅이 없다.
백조(swan)엔 흰색이 없고, 사막(desert)엔 모래가 없으며, 지구(earth)엔 공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백조의 호수’에 나오는 ‘검은 백조’를 말하기 어렵고,
강우량이 제일 적은 남극이 세계에서 가장 큰 사막이라는 말을 받아들이기 어렵고,
‘네모난 원’이란 말처럼 ‘지구평면설’이라는 자체모순 단어를 이해하기 어렵다.)
‘Brüder’라는 말이 ‘형제여’ 라는 호격인지, ‘형제이다’라는 보격인지, 아예 독립적으로 그냥 ‘형제’라는 탈격인지,
음악의 맥락을 통해 그 쓰임을 알아내어 옮긴다 해도,
그것이 같은 심상을 드러내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해,
나는 살면서 동생한테 ‘형제!’라고 불러본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덧붙여, 나는 가능한 한 시어를 순 우리말로 번역하려 했는데,
역설적이게도, 그리고 불행히도,
‘형제兄弟’, ‘자유自由’, 등 이 시의 근간이 되는 말에는 순 우리말이 없다.)
번역도 음악 해석이다.
클래식 음악에는 ‘원본으로서의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기표를 해석해서 연주하면 비로소 소리로 나타날 뿐이다.
녹음이 되어 원본으로서의 소리가 존재하는 대중음악과 달리,
클래식 음악은 해석되었을 때 비로소 존재하므로,
해석이야말로 클래식 음악의 본질적인 것이다.
연주도 음악 해석이니, 연주자들의 집합체를 연주하는 지휘도 음악 해석이다.
그러나 어떤 해석도, 그 해석에 따른 어떤 연주도, 가사가 주는 심상 이상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 이 심상을 살리는 가사 번역이야말로 사실상 가장 중요한 음악 해석이다.
- 서시 : 베토벤 자신의 글
베토벤은 교향곡에 최초의 사람 소리를 자신이 직접 쓴 글로 실었다.
도치하여 만든 각운을 무시하고 평서문으로 바꾸면 다음과 같다.
O freunde, nicht diese Töne!
Sondern lasst uns angenehmere und freundenvollere anstimmen!
오 벗들이여, 이런 소리는 그만!
이제 우리 더 편안하고, 더 기쁜 (자유로운) 목소리를 내보세!
여기서 두 단어를 짚어보자.
하나는, ‘Töne’, ‘Töne’는 ‘Ton’의 복수형이다.
직역하면 그야말로 ‘소리들’인건 맞는데, 일상언어에서는 ‘어조’라고 번역될 수 있다.
단조롭다고 하는 ‘monotonous’, 라든가,
‘넌 왜 그렇게 톤이 건방져!’라고 할 때 처럼,
분명히 상황이나 태도와 관련이 있는 뉘앙스이다.
여기서는, ‘더 편안한’이란 말이 현재 매우 불편한 상황과 태도를 암시한다.
또 하나는 ‘An-stimmen’이라는 단어인데,
어원대로 영어로 직역하면 ‘voice – on’ 쯤 된다. 즉, ‘목소리를 내다.’
노래하다(singen), 연주하다(spielen) 등의 단어를 놔두고 굳이 이 단어를 선택한 것은,
정말로 자유롭게 ‘목소리를 내다’라는 것에 의미를 두었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이 ‘소리’라는 말에는 ‘굴종하는 삶의 태도’가 함축되어 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 종교적 단어의 번역
쉴러나 베토벤이나 둘 다 독일인이므로 그들의 정서에는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 깊이 박혀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와, 특히 비종교인들의 정서와 공감대를 형성하기는 어렵다.
다른 번역과 달리, 종교적인 단어들의 번역은 훨씬 까다롭다.
합창단에서 노래하는 비종교인들에게 함부로 신앙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면 좋지 않다.
또 반대로 자신만의 신앙에 비추어 단어들을 달리 해석하는 각 종교인들에게 일일이 뜻을 맞출 수도 없다.
쉴러의 시 중 베토벤이 구성한 시나리오엔 이런 종교적인 단어들이 나온다.
Götterfunken, Elysium, Himmlische, Cherub, Gott, Vater, Schöpfer
쉴러는 이 단어들을 다음과 같은 개념으로 사용했다.
베토벤이 구성한 시나리오에 나오는 순서대로 적어보면 이러하다.
Götterfunken (신들의 빛) : 북구 게르만 신화 세계관의 개념이다.
Elysium(엘리지움) : 유대교의 에덴동산처럼, 그리스 신화 세계관의 낙원 개념이다.
Himmlische (하늘의 존재, 하늘같은 이) : 하늘을 신성하게 보는 인간적 개념이다.
Cherub (그룹 천사) : 생명나무 수호천사로 인간성 회복의 감시자 개념이다.
Gott (신) : 기독교 구약에서 온 개념이다.
Vater (아버지) : 기독교 신약에서 온 개념이다.
Schöpfer (창조주) : 이신론 혹은 자연신론적 개념이다. (내 번역에선 ‘큰 뜻’과 관련)
저 많은 종교적 단어 중, 베토벤의 시나리오에선 ‘Lieber Vater(사랑하는 아버지)’란 말이 유독 많이, 그리고 끝까지 나온다.
합창단이 피날레에서 온 힘을 다해 소리쳐 부르는 부분 중, 단 한번 나오는 가장 높은 B음정에도 다음 문장이 있다.
überm Sternenzelt muß ein lieber Vater wohnen.
신이란 말보다, ‘사랑하는 아버지’란 말을 훨씬 더 강조한 것이다.
유대교의 신은 ‘엘’이라고 하는데, 이슬람에서 ‘알라’라고 하는 것처럼 엘은 그냥 ‘신’이란 뜻이다.
이런 ‘신’이란 말 그 자체 말고는, 처음엔 신은 이름이 없었다.
그러니 ‘당신이 믿는 신은 누구요?’라고 물으면,
‘나의 신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등등이 믿었던 신이요’ 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모세가 시내산에서 신으로부터 직접 ‘나는 나다(I am who I am)’라는 말을 듣는다.
이 말을 모음 없이 자음으로만 이루어진 그들의 문자로 표기하면 ‘YHWH’ 쯤 되는데,
이걸 발음해서 여호와, 야훼, 혹은 예호바 등등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나다’라는 구약의 신의 이름을 굳이 우리말의 같은 뉘앙스로 표현하면 ‘난나님’이다.
신이 어떤 신인지 묻듯,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로 ‘당신은 누구요?’라고 하면,
성이 없던 옛날엔 ‘나는 누구의 아들이요’라고 말했다.
‘에디슨(son)’이 에디의 아들이듯, ‘빈(bin) 라덴’은 라덴의 아들이고, ‘벤(ben) 야민’은 야민의 아들이다.
‘안데르센(sen)’은 사람의 아들이며, 이를 히브리어로 하면 ‘벤 아담’이다.
‘벤 허’가 ‘우르(빛)’ 집안의 아들임을 자랑스레 드러내는 말이라면,
예수가 자신을 지칭한 ‘벤 아담’, 즉 사람의 아들(人子)은 그저 이름없는 집안이라고 자신을 겸허히 낮추는 말일 뿐이다.
전두환이 ‘본인(本人)은…’이라 말했다고 해서, 후세 사람들이 ‘그는 자신을 근본인간이라고 칭했다’라고 할 수 없듯이 말이다.
이 겸손한 ‘사람의 아들’이 어쩌다 ‘신의 아들’이라고 죄목을 썼을까.
그것은 아마도 ‘너와 내가 한 아버지 아래 형제’라는 말을 하다가 벌어진 일일 터이다.
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특이한 것으로, 이는 예수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모세 오경 중 신명기나, 다윗의 시편 등에 ‘아버지’라는 단어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것은 인간을 만들었다(generate)는 창조에 관련된 의미이지,
‘형제’나 ‘사랑하는’이라는 개념과는 거리가 있다.
예수의 기도, 즉 ‘주기도문’은 라틴어로 ‘Pater noster’, 독일어로 ‘Vater unser’라고 하는데,
기도문 제목이 말 그대로 ‘우리 아버지’이다.
‘Our Father in Heaven’이 우리말로는 어순 상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번역될 수 밖에 없지만,
서양인에게 더 중요한 것은 ‘하늘에 계신’이 아닌, ‘우리 아버지’인 것이다.
그러니 삼위일체의 ‘성부’는 오히려 가장 마지막에 나온 개념이다.
원래 창세기부터 신은 ‘영’이었는데,
갑자기 아들인 ‘성자’가 나타나서 신을 아버지라 부르고 나니, 거꾸로 ‘성부’가 필요해 진 것이다.
이렇게 신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예수의 입장에서,
신약의 신을 표현하면 ‘난너님’이다.
‘나는 너다’
신이 동떨어져 아무런 고통 없이 제3자로서 관조하는 ‘나는 나’가 아니라,
이 세상의 우리와 똑같이 아프고 괴롭고, 심지어 대신 죽기까지 하는, ’나는 너’인 것이다.
그가 우리 아버지이니, 예수의 입장에서 우리는 모두 그의 아들들이고,
너와 나는 형제일 수 밖에 없다.
참 역설적이게도,
쉴러가 쓴 모든 종교적 단어 중에 ‘아버지’란 말이 가장 흔한 보통 명사이니 가장 덜 종교적이어야 하는데,
예수로 인해 기독교가 독점한 이후, 오히려 가장 종교적인 뉘앙스를 갖는 말이 되어버렸다.
다른 종교에서는 기도할 때 신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다음 문장의 ‘Lieber Vater’라는 말을 어떻게 하면 덜 종교적으로 들리게 번역할 수 있을까, 오래 고민했다.
überm : Sternenzelt : muß : ein : lieber : Vater : wohnen.
(over the: tent of stars : must : a : dear : father : dwell)
(저 별들의 천막 너머 반드시 한 좋으신 아버지가 살고 있어야만 한다)
이 문장은, 쉴러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칸트의 철학에서 온 것이다.
거칠게 말해서,
‘이성을 아무리 분석해도, 도대체 우리가 굳이 윤리적으로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할 수 없으니, 우리는 신의 존재를 요청해야 한다.’라는 칸트의 입장에서 나온 것이니,
반드시 특정 종교로 국한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일단, 여기서 ‘lieber Vater’의 ‘lieber’는 흔히 번역되는 대로 ‘사랑하는’이라고 하면 어색하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인지,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인지도 모호하다.
그래서 잘 알려진 요한 1서의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라는 번역은 동어반복처럼 들려 이해하기 더 어렵다.
여기서 ‘lieber'는 영어로 표현하면 ‘dear’ 정도이다.
NIV성경의 번역은 깨끗하다.
‘Dear friends, let us love each other.’
즉, ‘친애하는 여러분’ 정도가 더 맞는 셈이다.
이젠 이 ‘한 좋으신(친애하는) 아버지’를 들여다보자.
- 'ㅇㄹ'
우리 말엔 크고, 좋고, 중요한 것을 나타내는 자음조합이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ㅇㄹ’이고, 또 하나는 ‘ㅅㄹ’이다.
‘ㅇㄹ’은 ‘답다’라고 하는 말과 어울리고, ‘ㅅㄹ’은 ‘스럽다’라고 하는 말과 어울린다.
공부 열심히 하는 학생은 ‘학생답다’고 하고, 몰래 담배피우는 학생은 ‘학생스럽다’고 한다.
그러나 ‘아름답다’, ‘사랑스럽다’라는 말은 있어도, ‘아름스럽다’, ‘사랑답다’라는 말은 없다.
즉, ‘ㅇㄹ’은 ‘마음’ 혹은 ‘머리’와 관련된 것이다.
‘알’에서 ‘알다’와 ‘아름다움’이 나오고, ‘얼’에서 ‘얼굴’이 나온다.
‘옳다’라는 말과 ‘어른’이라는 말, 다 익은 열매인 ‘아람’과 아름드리의 ‘아름’, 저 높은 곳을 ‘오르’는 것까지,
이 ‘ㅇㄹ’은 높은 정신성과 관련이 있다.
(음악에서도 ‘울림’은 ‘울다’에서 왔고 나아가 ‘어울림’으로 이어진다.)
‘ㅅㄹ’은 ‘몸’ 혹은 ‘가슴’과 관련된 것이다.
‘쌀’을 먹어서 ‘살’이 되면, 살을 보듬어 ‘사랑’을 하고, ‘사람’이 태어나 ‘삶’을 살며, ‘살림살이’를 한다.
가장 좋은 날은 ‘설’이고, 가장 큰 도시는 ‘서울’이고, 가장 큰 새는 ‘수리’이고, 가장 훌륭한 밥상은 ‘수라’이다.
밥 먹는 숟가락도 ‘술’이고 마시는 것도 ‘술’이다.
(우리가 음악으로 내는 ‘소리’도 매우 중요한 것일 수 있다.)
그러니 어쩌면 ‘아리랑, 스리랑’하고 노래하는 것도,
우리도 모르게 원래 갖고 있던 잠재의식에서 나왔을지 모른다.
여하튼, ‘ㅇㄹ’은 높은 정신성과 관련이 있다.
‘너’의 복수형은 ‘너희’이지만, ‘나’의 복수형은 ‘나희’가 아니라 ‘우리’이다.
‘우리’라는 말은 정신적 공동체를 연상시키는 ‘울’에서 온 것이다.
울타리, (가축의) 우리, 이런 것들이 다 같은 어원이다.
하느님인 ‘하늘님’을 ‘한울님’ 혹은 ‘한얼님’이라고 부르는 종교도 있듯,
‘하늘’은 ‘한울’, ‘한얼’과 또한 관련이 있다.
하지만 나는 종교와 상관없이, 오로지 ‘울’이란 말에 집중하기로 했다.
나는 쉴러의 ‘아버지 아래 한 형제’라는 개념을 하나로 모아,
‘한 울 안에’로 번역했다.
‘Sternenzelt’는 별들의 천막, 별들의 텐트이다. 즉 지붕과 관련이 있다.
쉴러는 문장 끝에 독립적으로 세계(Welt)라는 말을 굳이 집어넣어 각운을 맞추기까지 할 정도로,
천막이라는 뜻의 이 ‘Zelt’라는 단어를 중요시 여기며, 수 많은 연에서 반복해서 썼다.
‘한 지붕 아래’라는 말처럼,
‘한 울(타리) 안에’라는 말은 분명 ‘아버지’와 ‘형제’의 심상을 모두 갖는다.
그리하여 다음처럼 가사가 번역되었다.
“너흰 형제라!
저 별 너머 한 울 안에,
저 편 하늘 큰 뜻 아래!”
이것이 내가 최종으로 도착한 곳이다.
나와 같은 비종교인들도,
또 각자의 종교를 갖고 살아가는 종교인들도,
너그러이 공감해 주길 바랄 뿐이다.
베토벤 시나리오의 맥락과 그에 따른 번역
- 제 1연
시 첫 부분을 나타나는 개념대로 하나하나 나누어 쓰면 다음과 같다.
[1연]
자유,
아름다운 신들의 빛이여! [1] Götterfunken
낙원의 딸이여! [2] Tochter aus Elysium
하늘님이시여! [3] Himmlische
우리는 불에 취해
그대의 성소로 들어가나이다.
이렇게 쉴러는 자유를 점층법으로 점점 높여가며 부른다.
아름다운 빛으로, 천사같은 여인으로,
아니, 아예 신 그 자체로!
또한 이런 3 요소는 2연과 3연에서도 연계된 상징으로 이어진다.
[2연]
(이런 사람들은 우리와 함께하자.)
진정한 벗이 된다는 위대한 업적을 성취한 자 [3] Freund gelungen
아니면, 고운 여인의 사랑이라도 쟁취한 자 [2] Weib errungen
최소한 자기 영혼을 자기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자 [1] Seele, sein nennt
[3연]
우리가 받은 것은
포도주 (아름다운 빛) [1] Reben
입맞춤 (여인) [2] Küsse
죽음에서도 배신하지 않는 한명의 벗 (신적인) [3] einen Freund
그러나, 베토벤은 이 쉴러의 구조를 뒤엎는다.
일단, 놀랍게도 이 교향곡 끝의 마지막 단어를 시의 첫 구절로 설정했다.
Freude, schöner Götterfunken!
처음 시작한 단어로 곡을 끝맺는다니!
마치 애국가를 소재로 작곡한 교향곡의 마지막이 ‘우리나라 만세!’나, ‘길이 보전하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끝나는 셈이다.
베토벤에게는 ‘낙원의 딸(Tochter aus Elysium)[2]’이나 ‘하늘님(Himmlische)[3]’ 보다도, ‘신들의 빛(Götterfunken)[1]’이 더 중요하단 뜻이다.
계몽(Enlightenment)주의자인 베토벤에게 핵심 단어는 이 ‘빛’이었다.
그래서 원래 쉴러의 구조대로 점층법이라면,
‘신들의 빛이여[1]’보다 ‘하늘님이여[3]’의 음높이가 더 높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기본 멜로디조차 의도적으로 [3]에 가장 낮은 음을 쓰고 [1]에 가장 높은 음을 썼다.
아마 평범한 작곡가라면 점층법에 따라 다음과 같이 썼을 것이다.
[쉴러의 점층법이 적용된 가상의 멜로디]
당장 슈베르트의 곡만 보더라도, 당연히 ‘Himmlische[3]’가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베토벤의 멜로디에선 ‘Götterfunken[1]’이 가장 높은 음이고,
‘Tochter[2]’와 ‘Himmlische[3]’가 가장 낮은 음이다.
이렇듯, 쉴러의 [빛 < 딸 < 하늘님] 으로 점층되는 중요도가
베토벤에 의해서 [빛 > 딸 = 하늘님] 으로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으므로,
나는 ‘신들의 빛’에 집중하여 번역하였다.
영어의 ‘God’ 과 ‘good’ 처럼 ‘Gott’는 ‘Gut’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이다.
인사말 중 이탈리아어 ‘Addio’가 [ad(-에게) + Dio(신)]이고,
프랑스어 ‘Adieu’가 [a(-에게) + Dieu(신)] 이듯,
영어의 ‘Good bye’도 ‘[by + God]에서 왔다.
신이란 말은 삶에서 가장 선한, 가장 귀한 가치이다.
즉 ‘삶의 참’이다.
그래서 ‘신들의 빛’은 [삶의 참 + 빛]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같은 중요도인 ‘낙원의 딸’과 ‘하늘님’을 하나로 합치고,
앞에 나온 ‘아름다운(schöner)’이란 말의 심상을 넣어서,
‘하늘(,) 고운님’으로 만들 수 있다.
그리하여 ‘자유, 아름다운 신들의 빛이여! 낙원의 딸이여! 하늘님이시여!’로 시작하는 첫 연은 이렇게 번역되었다.
“자유, 삶의 참 빛이여! 하늘 고운님이여!
우리 가슴 불에 취해 그 빛 따르나이다.
부드러운 그대 품에 억센 사슬 깨어져,
모든 사람 형제되는 큰 뜻 이뤄지이다!”
- 제 2연
Wem der große Wurf gelungen,
eines Freundes Freund zu sein;
wer ein holdes Weib errungen,
mische seinen Jubel ein!
Ja – wer auch nur eine Seele
sein nennt auf dem Erdenrund!
Und wer’s nie gekonnt, der stehle
weinend sich aus diesem Bund!
이 연은 점강법으로 되어있다.
이 동맹에 들어올 자격, 즉 자유로운 세상을 맞이할 자격이 되는지 알아보는데,
자유란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라 쟁취해야 하는 것이므로,
무엇이라도 스스로 얻어내 본 경험이 있는지를 묻는다.
이 연을 현대식으로 풀어쓰면 아마도 이런 오디션 같은 대화가 될 터이다.
첫째,
Q - 당신은 ‘한 친구의 친구가 된다’라는 위대한 업적을 성취(gelungen)해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말의 ‘친구의 친구’는 마치 한다리 건너 친구의 느낌이 들지만, 여기서는 배신하지 않을 참 동지를 말한다)
즉, 그냥 벗을 ‘사귀어 본’게 아닌, 참된 벗을 ‘맺어낸’ 적이 있습니까?
A - 예
Q - 죽음 앞에서도 배신 안 할 수 있겠군요!
우리 함께 합시다.
둘째,
B - 아니오
Q - 그렇게 못해 봤으면,
혹시 어떤 고운 여인의 사랑이라도 쟁취(errungen)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냥 만나는 대로, 주어진 대로 사는 게 아니라,
사랑을 위해 아파본 적 있습니까?
다시 말해, 사람을 사랑할 줄 압니까?
B - 예
Q -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럼 우리 함께 합시다.
셋째,
C- 아니오
Q - 흠. 그것도 못 해봤으면,
적어도 당신의 영혼은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자신이 왕이나 귀족이나 교회의 소유물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C - 예
Q - 그럼 됐습니다. 소리질러! 우리 함께 합시다.
......
D - 아니오
Q - 아, 당신은 그 말조차도 못합니까?
그럼 미안하지만, 이 동맹에서 나가 주셔야겠습니다.
알아서 몰래 빠져나가십시오, 울어도 안 봐줍니다.
이 연에서 자격을 들먹이는 이유는, 사람을 제외시키려는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그 누구라도 ‘인간다움’을 가진 자는 모두 함께하자는 것이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은 자신의 작품 속 ‘만프레드’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나의 삶은 내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죽음은 누구의 것입니까?’
쉴러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생각한 자유를 누릴 인간다움의 최소단위는 ‘나의 얼은 내 것이요!’이었다.
“참된 벗을 맺어낸 자, 이제 여기 서리니,
사랑할 줄 아는 자면, 모두 함께할지라.
‘나의 얼은 내 것이요’ 말할 자는 남으라!
이마저도 못하는 자, 흐느끼며 떠나라!”
- 제 3연
3연은 그냥 봐서는 무슨 말인지 모르게 되어있다.
시는 행간이 중요하지만, 접속사가 없을 때는 맥락 파악하기가 어렵다.
Freude trinken alle Wesen 모든 존재는 자유를 마신다,
an den Brüsten der Natur, 자연의 젖가슴에서.
Alle Guten, alle Bösen 착한 이나, 나쁜 이나, 모두
folgen ihrer Rosenspur. 그의 장밋빛 자취를 따른다.
이게 무슨 말일까.
장밋빛은 와인의 빛깔이기도 하고, 젖가슴의 빛깔이기도 하고, 꿈꾸는 낭만의 빛깔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말이 결국 장밋빛이니 좋고 옳다는 말인가,
아니면 나쁜 이도 따라가니 나쁘고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게다가 마지막 행은 매우 황당하기까지 하다.
Wollust ward dem Wurm gegeben, 쾌락은 벌레에게 주어졌다,
und der Cherub steht vor Gott. 그리고 케룹은 신 앞에 선다.
이쯤 되면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서 급이다.
시를 번역해도 아예 알아 들을 수 없다.
이 문장이 9연의 문장과 댓구 관계라는 걸 파악하고 방정식 풀 듯 풀어보면,
이런 대칭구조가 된다.
Allen Sündern soll vergeben, 모든 죄인은 용서받을지니,
Und die Hölle nicht mehr sein. 그러면 더이상 지옥은 없으리라.
Wollust ward dem Wurm gegeben, 쾌락은 벌레에게나 주어지리니,
Und der Cherub steht vor Gott. 그러면 케룹은 신 앞에 서리라.
이런 식으로 유추해 가며 베토벤의 시나리오에 의거해서 짚어본 3연의 맥락은 다음과 같다.
Freude trinken alle Wesen
an den Brüsten der Natur,
Alle Guten, alle Bösen
folgen ihrer Rosenspur.
Küße gab sie uns und Reben,
einen Freund, geprüft im Tod.
Wollust ward dem Wurm gegeben,
und der Cherub steht vor Gott.
대자연의 젖가슴이 모든 존재에게 자유를 마시게 하니,
착한 이나 나쁜 이나, 개나 소나, 다들 장밋빛 자취를 따라간다.
[행간] - (하지만 진정한 자유를 향한 길은 그런 장밋빛이 아니다.
나는 그 길이 장밋빛이 아니라 핏빛의 가시밭길임을 알고 간다.)
우리가 가진 것은 오로지
(적어도 자기 영혼은 자기 것이라 부를 수 있는 용기를 주는) 포도주와
(사랑을 얻어낸 고운 여인의) 입맞춤과
죽음 앞에서도 절대 배신하지 않는 친구 하나 뿐이다.
이 맥락을 쉽게 이해하기 위한 단초가 될 만한 비슷한 싯구가 하나 있다.
내가 매우 좋아하는 예이츠(Yeats)의 시,
‘권주가(A drinking Song)’를 잠깐 곁눈질 해보자.
A Drinking Song 권주가
Wine comes in at the mouth 술은 입으로 들어오고
And love comes in at the eye; 사랑은 눈으로 들어온다;
That’s all we shall know for truth 우리가 늙어 죽기 전 알아야 할 것은
Before we grow old and die. 정녕 이것 뿐이리.
I lift the glass to my mouth, 나는 잔을 들어 입에 대고,
I look at you, and sigh. 그대를 바라보며, 한숨 짓노라.
‘정녕, 우리가 늙어 죽기 전 알아야 할 것은 이것 뿐이리.’
라는 예이츠의 고백과
‘우리가 받은 것은 술과, 사랑, 죽음 견딜 벗 하나 뿐이리.’
라는 쉴러의 고백은
부족함의 한탄이 아니라, ‘충분함’의 고백이다.
이 문장을 충분함의 고백으로 받아들이고 이어나가면,
우리가 받은 것은 술과, 사랑, 그리고 죽음 견딜 벗 하나 뿐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족하니)
쾌락같은 헛된 욕망은 벌레에게나 줘버리자.
그러고 나면 [und]
선악과를 따먹던 인간이 생명나무마저 건드릴까봐 지키던 천사 케룹이
비로소 우리가 인간답게 되었다고 여기며
신 앞에 돌아가 서게 될 것이다.
(케룹은 기독교 성경 창세기에 처음 등장하는 천사로,
개역성경에는 ‘그룹’으로 표기되었다.)
결국 헛된 욕망을 버리고 인간답게 진정한 자유를 향한 길을 가자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리고 베토벤의 시나리오 안에서는 출정 전 임전의 독려와 각오가 된다.
“뭇사람들 자유 찾아 장밋빛을 따르나,
무릇 자유 향한 길은 핏빛임을 아노라!
받은 것은 술과 사랑, 죽음 견딜 벗 하나.
헛된 욕망 다 버리고 인간답게 서리라!”
(하지만 진정한 자유를 향한 길은 그런 허황된 장밋빛이 아니다'
이 행간의 의미를 압축할 수 없어서 모색하다가,
7연의 ‘포도의 금빛 피 속에서 in der Traube goldnem Blut’ 라는 행과
8연의 ‘이것은 선과 피의 문제이다 gält’ es Gut und Blut’라는 행에서
‘핏빛’이란 말을 과감히 가져왔다.
누군가 내게 시비를 걸어와도 어쩔 수 없다.
진정한 자유를 향한 길은 장밋빛이 아니라 핏빛이라는 것.
이것은 나 자신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 제 4연과 겟세마네 씬
이렇게 각오를 다진 이들은 자유를 향한 투쟁의 길로 나선다.
흔히 ‘터키 행진곡’이라고 불리는 장면이다.
행진곡이 처음부터 정박이 아닌 엇박으로 나오며 불안하게 들린다.
터키 군대가 아니라 당나라 군대같은 오합지졸의 사람들이 모두들 쭈빗쭈빗 주저하고 있다.
여기서 베토벤은 4연의 앞부분 8행을 건너뛰고 뒤 4행의 합창단 부분,
즉, 자유가 직접 말하는 부분을 따오는, 이른바 신의 한수를 선보인다.
우리는 언제부터 누가 극 중의 주인공인줄 알게 되는가.
우리는 언제부터 그 주인공의 편이 되어 세계를 바라보는가.
이 순간이 담긴 장면을 나는 ‘겟세마네 씬’이라고 신조어를 만들어서 부른다.
겟세마네 씬이란,
예를 들어 영화에서, 극 중 등장인물들에게는 한 인물(주인공)의 내적 경험이보여지지 않지만,
영화 밖 관찰자에게만은 그 내적 경험이 보여짐으로써,
관찰자가 그 인물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가 사건의 주인공이 되고,
관찰자가 그 주인공과 같은 시선으로 세계를 볼 수 있게 되는 장면을 일컫는다.
여기선 바로 ‘자유’가 직접 나와서 독려하는 4연의 합창단 부분이다.
베토벤은 이를 테너 솔로의 목소리를 통하여 만들었다.
[4연]
Freude heißt die starke Feder 자유는 강력한 태엽일지라,
In der ewigen Natur. 영원한 대자연 속의. .
Freude, Freude treibt die Räder 자유, 자유가 바퀴를 돌린다.
In der großen Weltenuhr. 세계라는 거대한 시계 속에서.
Blumen lockt sie aus den Keimen, 자유가 싹에서 꽃을 이끌어내고,
Sonnen aus dem Firmament, 창공에서 태양들을 이끌고,
Sphären rollt sie in den Räumen, 공간에서 천구를 돌리지만,
Die des Sehers Rohr nicht kennt. 보는 이의 망원경으론 알 수 없을 뿐.
(여기까지가 베토벤이 건너 뛴 부분)
(합창단 = 자유)
Froh, wie [seine] Sonnen fliegen, [그]가 보는 태양들이
durch des Himmels prächtgen Plan, 하늘의 위대한 계획에 따라 날아가듯
Laufet Brüder eure Bahn,형제들이여, 너희의 길을 달려라,
freudig wie ein Held zum siegen. 승리를 앞둔 영웅처럼 기쁘게.
(베토벤이 따온 부분)
위에서 보듯, 원래 ‘그의 태양들’의 ‘그’는, 보는 이 (천체 관측자)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하지만 베토벤은 순서를 바꾸어서 이 부분을 ‘겟세마네 씬’으로 만들면서,
‘케룹은 신 앞에 선다’ 바로 다음에 나오도록 배치하여,
관측자의 태양들이 아니라 ‘신’의 태양들이 되도록 의도하였다.
이제, ‘모든 이들이 형제되는 자유의 세상’을 만들겠다고 투쟁에 나선 사람들을 들여다 보자.
이들은 1연에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공고를 보고,
2연에서 그 세상을 위해 투쟁에 나설 오디션을 보고,
3연에서 각오를 다지고 나온 사람들이긴 하다.
하지만 도대체 이들에게 ‘지금 내가 가는 이 길이 맞다’라는 확신은 어디 있는가.
사이비 종교에 빠진 것은 아닌지, 정치 사기꾼의 농간에 빠진 건 아닌지 어떻게 아는가.
아니, 그동안 배워온 왕권신수설대로 신이 왕에게 권력을 부여하고 인간의 계급을 나누어 놓은 것이 진짜라면, 과연 이 길을 가는 게 옳은가.
‘모든 이들이 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다’라는 이른바 자연법은,
도대체 자연 그 어디에 나가봐도 쓰여 있는 곳이 없지 않은가.
이들에겐 확신이 없다.
이 때, 자유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것은 그들에게만 들리는 신의 소리이고,
그 개개인의 가슴을 울리는 체험일 뿐이다.
‘저 하늘의 모든 별들이 하나하나가 다 태양인데,
큰 뜻의 계획대로 나아가는 거야.
너희도 하나하나가 태양이니,
주저하지 말고 자유로운 세상을 향해 달려가.
너희는 승리하게 되어있어. 그게 하늘의 뜻이야!’
쭈빗쭈빗하던 이들은, 이에 감화되고 용기 백배하여 달려나가,
싸워 승리하는 주인공이 된다.
당시 계몽사상은 ‘이성을 지닌 자는 평등하다’와 ‘이성의 본질은 자유이다’라는 것이었으니,
베토벤이 설정한 이 ‘자유’의 소리는 결국 ‘이성’의 소리라고도 할 수 있다.
바로 이 겟세마네 씬이,
우리의 주인공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이 시나리오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자유]
"보라! 저 많은 별들, 모든 태양들이
하늘 정한 큰 뜻대로 자기 길을 가나니.
가라, 또한 너희 길! 가라, 하늘이 정한 길!
가라, 결코 두려워 말라! 주저 말고 가라!
가라, 함께 달려가라!"
[인간]
"가자! 가자, 하늘이 정한 길!
주저 말고 달려가자, 우리 함께 가자!"
- 드디어 도착한 1연 후반부
이후, 드디어 투쟁이 벌어진다. 오케스트라는 지난한 싸움을 벌인다.
그리고 마침내, 승리한다.
승리의 찬가를 함께 부르고 나면, 그들 앞에 나팔 소리와 함께 새로운 세계가 등장한다.
이게 꿈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하여간 다른 세상이다.
아마도 1연에서 불에 취해 들어가겠다고 한 성소(Heiligtum)이리라.
이곳에서 자유의 목소리를 듣는다.
[1연] (합창단 = 자유)
Seid umschlungen Millionen!
Diesen Kuß der ganzen Welt!
Brüder – überm Sternenzelt
muß ein lieber Vater wohnen.
내 부드러운 품에 안기어라, 만민들아.
(너희가 소망했던 대로), 나의 마법이 일어나리니.
이제 이 입맞춤을 전 세계에 주노라.
(왕이건 거지건, 남자건 여자건, 노인이건 아이건, 모두에게 주노라).
[입맞춤 - 마법이 일어난다]
형제 - 너흰 이제 형제다.
저 별 너머 한 울 안에!
사람들은 아직 얼떨떨하다.
의심하는 사람들을 향해 더더욱 부드럽게 자유는 말한다.
이를 베토벤은 쉴러의 시 3연 합창단 부분에서 따왔다.
[3연]
(합창단 = 자유)
Ihr stürzt nieder, Millionen?
Ahndest du den Schöpfer, Welt?
Such’ ihn überm Sternenzelt,
über Sternen muß er wohnen.
다들 엎드렸느냐? 느껴지느냐, 저 창조주의 뜻이?
(창조의 뜻이 설마 너희를 계급으로 나누고 노예로 만드는 것이겠느냐?)
(너희가 아직도 형제임을 못 느끼겠으면) 눈을 들어 찾으라!
저 별 너머 분명 큰 뜻이 있으리니!
마법의 황홀경에 빠진 인간들의 목소리와 자유의 목소리가 동시에 대위법으로 어우러지고, 점점 고조된다.
드디어 이들은 이를 ‘전 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가득찬다.
이 황홀경을 경험한 인간들은 이제 정신을 차리고 의심을 벗어던진다.
그리고 형제됨을 확신한다.
[자유] - (나팔 소리와 함께 : 신탁을 내리듯)
나의 품에 안기어라! 주노라 내 입맞춤!
[인간] - (바이올린 소리와 함께 : 신탁을 받듯)
나의 품에 모두 안겨 입맞춤 다 받으라!
[자유]
형제, 너흰 형제라! 저 별 너머 한 울 안에!
[인간]
형제, 이젠 형제다. 저 편 하늘 큰 뜻 아래.
[자유] - (의심하는 인간들에게)
무릎 꿇고 귀 기울이라! 들리는가 저 뜻, 큰 뜻?
눈을 들어 찾으라! 분명 큰 뜻 있으리니!
(자유와 인간이 함께 어우러진다)
[자유] 나의 품에 모두 안겨 입맞춤을 받으라!
[인간] 자유, 삶의 참 빛이여, 하늘 고운님이여!
[자유] 나의 품에 안기어라, 입맞춤을 주노라, 전 세계에!
[인간] 우리들은 불에 취해 그 빛 따르나이다.
(의심 해소와 깨달음의 확신)
[인간]
무릎 꿇고 귀 기울여! 들리는가 저 뜻, 큰 뜻?
형제! 이젠 형제다!
저 별 너머 한 울 안에, 저 하늘 큰 뜻 아래!
- 피날레
이제 마지막 장면이다.
다시 현실 세계.
인간의 모습으로 선 시인들이
‘자유의 부드러운 품 안에서 모든 사람 형제되는 큰 뜻이 이루어지이다’
라고 소망한다.
그에 동조해 모든 사람들이 따라 부른다.
하지만 무응답.
다시 한번 힘내서 모든 사람이 간절히 소망을 외치자,
그 시인들이 갑자기 매우 신성한 모습으로 변모한다. (Deus ex Machina)
그리고 매우 부드러운 소리로, 매우 천천히,
‘큰 뜻, 이 땅에 이루리라’
라고 선포하고는 조용히 사라진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온 힘을 다해 ‘삶의 참 빛’인 자유를 염원하면서 막이 내린다.
베토벤의 독백으로 시작한 시인, 즉 예술가는 땅과 하늘을 잇는, 현실과 이상을 잇는 존재이다.
이 시인은 인간적이기도 하고 신적이기도 하다.
나는 베토벤에게서 이 두 모습을 모두 본다.
맺음말
순 우리말로 ‘비다’와 ‘배다’ 는 가능태와 현실태를 나타낸다.
‘배다’의 중세 표기 ‘ㅂ.ㅣ다’는 ‘비다’란 말과 ‘배다’란 말이 긴밀한 연관이 있음을 보여준다.
빈 것이 가득 차면, 우리는 그것을 ‘참’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참’은 현실에서는 도달하지 못할 이상향의 그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가득 ‘참’까지의 배어있는 과정이 현실태이다.
빈 것을 가득 찬 것으로 되게 하려고 우리는 열심히 ‘배운다’.
그 과정은 운동이고, 운동은 빈 상태나 찬 상태가 아닌, 밴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인생에서 두번의 ‘참’ 겪는다.
첫번째는 엄마의 배 속에서 밴 상태로 있다가 달이 가득 ‘차면’ 새로운 세상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 비로소 새로운 세상에서 숨쉬기 시작한다.
두번째는 그 숨이 가득 ‘차면’ 마지막 숨을 거두고 이 세상을 떠나 어딘지 모를 다음 세상으로 가는 것이다.
이 두번의 ‘참’ 순간은 우리가 겪긴 하지만, 느낄 수도 기억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현실의 삶에서는 ‘참’을 결코 경험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베토벤과 같은 위대한 예술가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이 현실에서도 ‘참’을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바로 다른 세계에서 참을 ‘꾸어’와서 이 세계를 ‘채우’는 것이다.
우린 이것을 ‘꿈’이라고 부른다.
베토벤은 모든 인간이 자유로운 참 세계를 염원했다.
그리고 그 꿈은 이 위대한 작품이 되었고,
그 꿈으로 우리 삶을 아름답고 숭고하게 ‘꾸며’주었다.
그가 꿈꾼 세상에서, 우리는 아름다움과 숭고함에 ‘숨이 멎는’ 순간으로 ‘참’을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그와 함께 자유를 염원한다.
‘참’을 소망한다.
하지만 이 땅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아직 아득하다.
‘참’의 어원이 ‘참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숨을 참는 것도 ‘숨이 멎는’ 경험 중 하나이니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쉴러도 5연에서 자유의 입을 빌려 이미 말해 주지 않았는가!
Duldet mutig, Millionen! 용기내어 참으라, 만민들아!
Duldet für die beßre Welt! 더 나은 세계를 위해 참아내라!
-끝-
- 뒷 이야기
1.
나는 베토벤의 9번을 지휘해 보고 싶어서 지휘자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단 한번도 이 곡을 지휘해 본 적이 없다.
젊은 시절, 나는 지휘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귀’인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귀가 좋으니 지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베토벤은 정확히 지금 내 나이에 이 곡을 작곡하고 5월 7일 첫 연주를 지휘했다.
그리고 이 곡을 지휘한 후 다시는 지휘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베토벤, 그는 왜 귀도 들리지 않는 주제에 이 곡을 지휘하겠다고 굳이 지휘봉을 들고 무대에 섰을까.
그 고집스런 음악가가 아무 소리도 안들리는데 눈을 부릅뜨고 무대에 서있는 모습을 생각하면 나는 가슴이 저민다.
그가 들려주고 싶었던 것은 정말로 ‘이런 소리가 아니고, 참 목소리를 내는’ 것이었을 터이다.
그 정신성을 보여주려 그는 무대에 섰고, 소리가 아닌 얼을 지휘했다.
나는 그의 지휘가 가장 위대한 지휘라고 믿는다.
이번 5월 7일 연주회에서도 그의 얼이 노래로 울려퍼졌으면 좋겠다.
2.
나름 심혈을 기울였음에도, 번역본에 아쉬움이 많다.
나는 시인도 아니고, 번역가도 아니고, 작가도 아니다.
나의 이 시도가 누군가에게 자극이 되어, 훨씬 더 좋은 번역을 하고
그로 인하여 더 많은 사람이 베토벤의 정신성을 더 잘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 구자범
참음악 스튜디오에서 4월2일, 하루 만에 쓰다
다음 링크를 통해 볼 수 있는 동영상은 이 번역 프로젝트를 하게된 계기가 된 것이다.
왜 ‘자유’의 송가인지, 그리고 왜 굳이 ‘우리말’로 부르고자 하는지 설명한 강의 동영상이다.
2년전 kbs의 한 프로그램에서 작곡과 학생들을 앞에 두고 3시간여 강의한 것을 1시간 정도로 편집한 것이다.
혹시라도 관심이 생기신 분들은, 들여다 보시길 바란다.
https://www.youtube.com/watch?v=43iFUnbovGI&t=1838s
번역 가사 전문
- 베토벤이 쉴러의 시를 재구성한 시나리오 -
[시인 : 베토벤]
(거짓된 삶에 진저리치며)
오 벗이여, 이런 소린 그만!
이제 우리 참 목소리를 내보세,
더 자유롭게!
# 베토벤이 꿈꾸는 세상
[시인]
자유!
[인간]
자유!?
[시인]
(소망과 믿음의 선언)
자유, 삶의 참빛이여! 하늘 고운님이여!
우리 가슴 불에 취해 그 빛 따르나이다.
부드러운 그대 품에 억센 사슬 깨어져,
모든 사람 형제되는 큰 뜻 이뤄지이다!
[인간]
부드러운 그대 품에 억센 사슬 깨어져,
모든 사람 형제되는 큰 뜻 이뤄지이다!
[시인]
(자유로울 인간의 자격 공표)
참된 벗을 맺어낸 자, 이제 여기 서리니,
사랑할 줄 아는 자면, 모두 함께할지라.
‘나의 얼은 내 것이요’ 말할 자는 남으라!
이마저도 못하는 자, 흐느끼며 떠나라!
[인간]
‘나의 얼은 내 것이요’ 말할 자는 남으라!
이마저도 못하는 자, 흐느끼며 떠나라!
[시인]
(임전 각오와 독려)
뭇사람들 자유 찾아 장밋빛을 따르나,
무릇 자유 향한 길은 핏빛임을 아노라!
받은 것은 술과 사랑, 죽음 견딜 벗 하나.
헛된 욕망 다 버리고 인간답게 서리라!
[인간]
받은 것은 술과 사랑, 죽음 견딜 벗 하나.
헛된 욕망 다 버리고 인간답게 서리라!
# 행진곡 (쭈빗쭈빗 출정)
[자유 : 시인의 모습으로]
보라! 저 많은 별들, 모든 태양들이
하늘 정한 큰 뜻대로 자기 길을 가나니.
가라, 또한 너희 길! 가라, 하늘이 정한 길!
가라, 결코 두려워 말라! 주저 말고 가라!
가라, 함께 달려가라!
[인간]
가자! 가자, 하늘이 정한 길!
주저 말고 달려가자, 우리 함께 가자!
# 푸가 (투쟁)
[인간] - (승리의 찬가)
자유, 삶의 참 빛이여, 하늘 고운님이여!
우리 가슴 불에 취해 그 빛 따르나이다.
부드러운 그대 품에 억센 사슬 깨어져,
모든 사람 형제되는 큰 뜻 이뤄지이다!
# 다른 세계 (포상으로 마법이 이뤄지는 자유의 성소) : 3박자 부분
[자유] - (신탁을 내리듯)
나의 품에 안기어라! 주노라 내 입맞춤!
[인간] - (신탁을 받듯)
나의 품에 모두 안겨 입맞춤 다 받으라!
[자유] - (신탁을 내리듯)
형제, 너흰 형제라! 저 별 너머 한 울 안에!
[인간] - (신탁을 받듯)
형제, 이젠 형제다. 저 편 하늘 큰 뜻 아래.
[자유] - (의심하는인간들에게)
무릎 꿇고 귀 기울이라! 들리는가 저 뜻, 큰 뜻?
눈을 들어 찾으라! 분명 큰 뜻 있으리니!
(자유와 인간이 동시에 함께 어울어진다)
[자유] - (부드럽지만힘있게)
나의 품에 모두 안겨 입맞춤을 받으라!
[인간] - (황홀하게)
자유, 삶의 참 빛이여, 하늘 고운님이여!
[자유]
나의 품에 안기어라, 입맞춤을 주노라, 전 세계에!
[인간]
우리 가슴 불에 취해 그 빛 따르나이다.
(의심 해소와 깨달음의 확신)
[인간]
무릎 꿇고 귀 기울여! 들리는가 저 뜻, 큰 뜻?
형제! 이젠 형제다!
저 별 너머 한 울 안에, 저 하늘 큰 뜻 아래!
# 현 세계
[시인 : 인간의 모습으로]
자유, 하늘 고운님이여!
부드러운 그대 품에 억센 사슬 깨어져,
모든 사람 형제되는 큰 뜻 이뤄지이다!
[인간]
부드러운 그대 품에 억센 사슬 깨어져,
모든 사람 형제되는 큰 뜻 이뤄지이다!
[시인 : 신성한 모습으로]
모든 사람 형제되는 큰 뜻 이 땅에 이루리라!
[변화된 인간]
나의 품에 안기어라, 입맞춤을 주노라, 전 세계에!
형제, 너흰 이제 형제로다!
저 별 너머 한 울 안에, 저 편 하늘 큰 뜻 아래!
나의 품에 안기어라, 입맞춤을 주노라, 전 세계에!
자유, 삶의 참 빛이여, 하늘 고운님이여!
자유! 자유! 삶의 참 빛!
삶의 참 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