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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쓴 글

부활 – 그 뜻이 이 땅에 이루어 지이다 (2010)

by 구자범 2024. 1. 2.

광주 민주화 운동 30주년 음악회 팜플렛에 실은 글

 

부활 뜻이 땅에 이루어 지이다 

 

나는 연주자가 자신이 연주하는 곡에 대해 언어로 직접 언급하는 것을 별로 달가워 하지 않는다.

음악은 작곡가의 초창조와 연주자의 재창조 그리고 청자의 추창조로 이루어 지는데,

자칫하면 연주자의 자의적인 해설이 작곡가의 초창조를 훼손하거나 청자의 추창조를 방해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외적으로 이야기를 조금 하고 싶다.

이야기라고 이름 붙인 것은,

재창조하는 연주자로서의 해석이 아니라 포장마차에서 소주 잔을 기울이던 사람이 순간의 분위기에서 추억을 떠올리거나 아름다운 상상을 하는 정도란 뜻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야기는 말러의 2 교향곡에 붙이는 이야기가 아니라,

삼십 년이 지난 오월에 광주에서 우리가 노래하는 부활 붙이는 이야기이다.

 

말러의 교향곡 부활과 오월 광주의 부활

 

나는 교향곡 2번의 구성과 가사가 삼십 광주의 오월의 이야기와 너무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비유적인 이야기에 현실적인 것을 일대일 대응시킬 없듯,

이야기도 아닌 교향곡이라는 음악에 광주의 오월이라는 특수한 사건을 일대일 대응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유비적인 해석은 문제를 일으킬 있지만 유비성 자체가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일조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도 없다.

그러니 말러 자신이 하필이면 5 18일에 죽었으며 교향곡을 꿰뚫는 주제가 Urlicht’인데 하필이면 광주란 이름도 빛의 고을이라는 등의 사소한우연의 일치들에만 오로지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와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살아간 말러의 음악에서 인간의 고통과 죽음 그리고 진정한 삶과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향한 염원을 발견하고,

그것이 삼십 오월 광주에 있었던 정신과 맞물리고 있다고 연관 짓는 것이 무리한 유비라고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말러의 교향곡을 영화음악으로 오월 광주라는 영화를 만든다면,

어쩌면 다음과 같은 그림을 떠올릴 있을지 모른다.

 

……

 

말러는 스스로 1악장을장례식Totenfeier’이라고 일컬었다.

교향곡의 처음 시작이 장례식이라니

앞으로 남은 다음 개의 악장에선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벌써 무덤을 보여주는 것일까.

우리의 우려를 이미 알고 있다는 ,

말러는 1악장 끝에 반드시 5 이상을 쉬고 2악장을 연주하라고 써놓았다.

다시 말하면 교향곡 2 구성은 시간적 순서가 바뀌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마치 영화박하 사탕에서 주인공이 처음에 다시 돌아갈래!” 라고 외친 장면이 바뀌어 옛날로 돌아가는 구성과 비슷하다고 있다.

이렇게 장례식이라는 제목으로 비장하게 시작한 교향곡의 1악장은 마지막에 무덤에 흙을 뿌리는 듯한 허무한 음향으로 끝난다.

수많은 시신들이 놓여있는 오월의 장례식….

 

2악장은 다시 옛날로 돌아간 장면.

평범한 소시민의 일상이다.

마치 농민들이 목가를 부르며 부드러운 춤을 추는 듯한 아주 따뜻하기 그지 없는 삶의 노래이다.

이렇게 평온하던 2악장의 고요함 끝에 3악장의 처음이 깜짝 놀랄 북소리로 예기치 않은 운명처럼 다가온다.

 

3악장은 시민들이 결전을 앞두고 밤을 지새는 듯한 장면 같다.

분위기는 매우 반어적이다. 

이기지 못할 싸움을 앞둔 사람들이 두려움을 감추려 애쓴다.

적막 속에 드럼통의 장작불꽃이 튀는 바라보며 많은 상념이 오가는데 갑자기 누군가 우스개 소리를 하는 듯하다.

(말러는 실제로은 클라리넷이 삐딱한 음색으로 오히려유머러스하게 연주하라고 써놓았다)

마치 영화화려한 휴가에서 택시 기사가 내일의 결전을 앞두고 밤을 새며 두런두런 이야기하다가 어느 방향으로 절을 해야 하는지 몰라 우스운 상황을 유발하는 듯하다.

중간에는 갑자기 내일의 결전을 떠올리게 하는 어마어마한 소리도 들려오기도 한다.

 

그러다가 장면이 바뀌어 4악장은 극도의 고요함으로 시작한다.

4악장의 제목은  Urlicht ’이라고 되어있다.

그런데 처음에 성악가가 뜬금없이 달랑 장미여!”라는 마디의 감탄사로 노래를 시작한 뒤에 아무런 가사없이 간주가 이어진다.

원래 가사는 ‘O Ro”schen roth’ 되어있으니 정확히 번역하면 붉고 작은 장미꽃이여이고,

여기에서는 마지막의붉다rot(h)’ 단어가 가장 강조 되어있다.

마치 이토록 아름다운, 하나의 작은 핏방울이여!’ 라고 말하고 싶은 . 

금관들이 연주하는 간주가 끝나면 전혀 다른 내용의 노래가 다시 시작되는데 가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사람이 자신은 너무 고통을 받았으니 이제는 천국에 살고 싶다고 하며 신을 향하여밝고 넓은 길로간다.

천사 나타나 길을 막는다.

사람은 애원한다.

제발, 막지 말아요.’ 라고.

그는 밝고 넓은 길을 가는 것이 신에게로 가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끝까지 천사에게 호소하고 애원한다. ]

 

허무하게도 이것으로 노래는 끝이다.

아무런 답변도 듣지 못하고 후의 이야기도 없이 그냥 호소하고 애원만 하다가 끝난다.

아니, 도대체 천사가 신에게로 가는 길을 막다니, 이런 모순이 있을 수가.

그렇다면 혹시 사람은 악마를 천사로 착각했던 것일까.

아니다. 오히려 그는밝고 넓은 신에게로 가는 길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천사는 그에게 나타나서, 밝고 넓은 길은 신에게로 가는 길이 아니라고 알려준다.

신에게로 가는 길은 오히려좁고 어두운 가시밭 이라는 .

그러나 고통스러운 삶에 지친 사람은 천사의 행위를 도대체 이해할 없다.

아니 이해한다고 치더라도 이젠 너무 고통스러워서 차마 좁은 길을 수가 없다.

그는 밝은 빛을 바라며 허망하게 눈감는다.

나는 여기서 삼십 오월 광주에서 사람이 억울하게 죽어가며 눈을 감기 바로 마지막 환상을 보고 있는 듯한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사람의 작은 핏방울이야말로 처음에 나지막이 읊조렸던 바로 붉고 작은 장미꽃 것이다.

 

5악장에 들어서면 드디어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총성이 난무하고 사람들이 쓰러진다.

주먹밥이 만들어지고, 헌혈 하려는 행렬이 이어지고, 거리에는 끊임없는 외침이 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조용해 진다.

그리고 1악장의 장례식이 끝난 다음으로 다시 장면은 전환한다.

아니, 30년이 지난 오늘로 전환한다.

 

평화로운 듯한 땅에서 소리가 들리는 아침이 밝아오고,

드디어 합창단이 조용히 속삭이며 영령들을 부른다.

일어나, , 일어나요….., , …., 이제 아침이에요.”

 

하지만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은 세상에는, 꿈이 실현되지 않은 세상에는,

그들이 일어날 이유도 없고 일어날 수도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 그대, 사랑 그대, 슬퍼하지 마세요.

당신이 꿈꾼 세상을 이제 우리가 이루어 가겠습니다.”

라고 의지를 밝힌다.

 

이제 우리는 

살기 위해 죽은 자들이여, 빛을 따른 그대들은 모두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라고 믿고 노래하지 않을 밖에 없다. 

뜻이 살아남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너무 허망하다.

그대가 꿈꾼 세상이 우리가 꿈꾸는 나라이고,

빛을 따른 그대 뜻의 부활이 나라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뜻을 함께 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꿈꾸는 나라를 이룰 없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우리는 고백을 

어둠을 뚫고, 되어 살아나라!”

라고 감히 명령형으로 외칠 있게 되는 것이다.

 

오월 광주 - 나라를 꿈꾸며

 

기독교의 성경을 보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른바부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구약에는 엘리야가 살린 아이도 있고 신약에는 예수가 살린 나사로도 있다.

요즈음에도 해외 토픽 뉴스를 보면 믿거나 말거나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야기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부활 그리 대단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잠시 부활이라는 개념을 기독교적인 것으로만 한정한다면,

기독교에서부활 의미는 온통예수 부활에만 집중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럴까.

아마도 예수의 부활이 개인사가 아닌 공동체에 일어난 역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를 따르다가 그의 죽음에 놀라서 도망갔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다시 모인초대 교회라고 하는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가 생기고 나서,

비로소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기독교 성경에 의하면 인간에게 천국이 있었다.

한번은 신이 직접 만들어 에덴 동산이었고,

한번은 이른바 성령의 역사로 인간들이 만든 초대 교회였다.

초대 교회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작한 뜨거운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였다.

그들은 공동체 정신을성령의 역사라고 일컬었고,

그것을예수의 부활이라고 믿었다.

손가락을 예수 옆구리의 뚫린 구멍에 넣어보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 처음에는 예수의 부활을 개인사로 여겼던 도마라는 제자조차도,

사랑의 공동체 나타난 예수의 부활 앞에서는 손가락은 커녕 꼼짝도 없었다.

부활은 손가락을 넣고 자시고 그런 부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삼십 오월, 광주에 전대미문의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우리나라에 역사상 처음으로 작은 천국이 나타난 것이다.

사실, 독재에 항거하여 일어나 싸우다 죽은 것만 놓고 보자면 오월 광주는 그다지 특별한 사건이 아니었다.

독재와 억압에 항거하여 싸우다 죽은 사례는 광주 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에 이미 매우 많이 있었다.

 

그런데 광주의 오월은 특별하다고 하는 것일까.

당시 광주는억울함속에 갇힌 사회였다.

바깥에서는 광주를 빨갱이와 폭도들이 난동을 부리는 지옥으로 선전했고,

광주는 외로운 바위섬처럼 나라에서 갇혀 버렸다.

실제로 그렇게 폐쇄된 사회에서는 아닌게 아니라 지옥 같은 일들이 벌어지기 십상이다.

LA 흑인 폭동사태를 보더라도, 치안이 없어진 순간 제일 먼저 약탈과 방화와 살인이 일어났음을 있다.

게다가억울한사람은 분을 이겨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아니할 짓도 하게 되는 판이다.

그런데 바로 광주에서는 오히려 하나의 작은 천국을 만들어 냈다.

서로 나누고 사랑했다.

주먹밥으로 나누고 헌혈로 나누었다.

누구나 끔찍한 지옥일 것이라고 예상한 곳에 사랑과 평화가 있었다.

그들은 가족과 동료들의 죽음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도대체 무엇을 보았길래 어떻게 그러한 죽음 앞에서 서로 사랑할 있었을까.

 

나는 우리나라 역사에 천국이 있었다면 바로 오월 광주 꼬뮌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광주 오월 정신은 들고 공수부대와 맞서겠다고 나선 용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사랑으로 나누며 평화를 맛보는 참된 나라를 향한 정신이 가장 광주 오월 정신인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비로소 그때 죽어간 이들을살기 위해 죽은 들이라고 부를 있고,

죽음을 앞에 두고 그들이 것을진정한 대한 믿음이라고 일컬을 있고,

그러하기에 그들의 정신은 지금 땅에서 정말로부활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꿈꾸고 만들어 갔던 사랑의 공동체를 우리가 이루는 것이 그들의 부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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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노래한다는 것은 자체로 사랑함의 확인 작업인지도 모른다.

삼십 오월 광주의 시내 복판,

모든 시민들이 모여서 아무런 악기 반주없이 함께 소리 높여 애국가를 부르는 모습에서,

나는 어떤 것보다도 아름다운 음악을 듣는다.

빛을 향한 군중의 함성은 그냥 단순한 목소리의 집합체가 아니다.

소리가 아닌 차원이 다른 무엇, 자체로 천국의 아름다움인 것이다.

 

나는 말러의 교향곡부활 매개로 모든 시민이 함께 노래하는 순간,

오월 정신의 부활을 경험하고 나라의 아름다움을 맛볼 것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