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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18

베토벤 9번 '자유의 송가' 우리말 번역 왜 ‘기쁨’이 아니라 ‘자유’인가 독일이 통일되었을 때, 지휘자 번스타인은 베를린에서 ‘환희(기쁨)의 송가’를 ‘자유의 송가’란 제목으로 연주했다. 당시 나는 번스타인이 행사취지에 맞게 자의적으로 단어를 바꾸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유태계 미국인이 임의로 제안한 단어를 그 많은 독일인들이 받아들여 노래했는지는 의문이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원래 시가 ‘자유의 송가’였고, 번스타인이 함부로 원곡을 훼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원뜻을 살려 제대로 연주한 것이란 걸 알게 되었다. 쉴러는 이 ‘기쁨의 송가’를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4년 전인 1785년에 썼다. 1759년생인 쉴러가 26살의 피끓는 젊은 나이에 쓴 것이다. 쉴러는 친구들과 포도주를 마시다가 잔이 깨지자, 마치 우리가 .. 2023. 4. 7.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나의 첫 파이프는, 삼십년 전 내가 철학과에 입학하자 누나가 미국에서 선물로 준 것이다. 어릴 적에 갔던 친척 할아버지 댁의 어둑어둑한 서재는 파이프담배와 낡은 책들의 향이 어울려 매우 고고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향이 좋아서 누나와 나는 몰래 그 방에 들어가곤 했다. 그곳의 은은한 향은 고결하고 온화한 노교수의 깊은 사색이 뿜어낸 것으로 느껴졌다. 담배를 싫어하는 누나가 파이프를 내게 선물한 건, 아마도 나와 같은 이 추억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향을 품은 삶을 동경하여, 어린나이에 파이프를 물었다. 고삼 때 식구들이 다 미국으로 갔다. 대학입시 때문에 혼자 한국에 남았던 나는 그 시기를 아주 자유롭게 보냈고, 그러다보니 이미 어른이 된 듯 했다. 그.. 2020. 8. 28.
맛을 기록하는 법 맛을 기록하는 법 사물에 내재한 참된 맛을 ‘멋’이라고들 한다. 돌아가신 내 선생님 아르프 지휘자는 그야말로 멋진 분이셨다. 선생님은 음악을 제대로 하려면 청각뿐 아니라 모든 감각에 충실해야한다며, 그림, 시, 요리, 와인, 향수 등 온갖 것들을 가르치셨다. 하루는 당신을 ‘카푸치노 메이킹 일인자’라고 자칭하시며, 다방커피와 필터커피가 주류이던 90년대 한국에서 온 내게, 손수 에스프레소를 뽑아 카푸치노를 만들어 주셨다. 그 황홀한 맛에 반한 나는 곧 열심히 카푸치노를 배웠다. 갈아낸 콩 굵기, 우유 지방함유량, 거품비율, 컵 온도까지. 이년쯤 뒤 내가 정성껏 만든 카푸치노를 올려드리자, 선생님은 눈감고 그 맛을 한참 음미하시더니 눈을 짓궂게 한번 찡긋하고는, 마치 작위 수여식을 하듯 엄숙한 목소리로 “.. 2020. 7. 29.
섬의 아픔을 뭍이 기억하다 섬의 아픔을 뭍이 기억하다 아픔을 기억하는 것은 매우 아픈 일이다. 내 아픔을 기억하겠다고 다시 헤집어내는 과정은 너무나 고통스럽다. 그러니 남의 아픔마저 내 아픔으로 기억하기는 더욱 어렵다. 4.3은 그저 슬픈 사건이 아니라 매우 아픈 사건이다. 한 사건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객.. 2018. 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