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1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나의 첫 파이프는, 삼십년 전 내가 철학과에 입학하자 누나가 미국에서 선물로 준 것이다. 어릴 적에 갔던 친척 할아버지 댁의 어둑어둑한 서재는 파이프담배와 낡은 책들의 향이 어울려 매우 고고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향이 좋아서 누나와 나는 몰래 그 방에 들어가곤 했다. 그곳의 은은한 향은 고결하고 온화한 노교수의 깊은 사색이 뿜어낸 것으로 느껴졌다. 담배를 싫어하는 누나가 파이프를 내게 선물한 건, 아마도 나와 같은 이 추억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향을 품은 삶을 동경하여, 어린나이에 파이프를 물었다. 고삼 때 식구들이 다 미국으로 갔다. 대학입시 때문에 혼자 한국에 남았던 나는 그 시기를 아주 자유롭게 보냈고, 그러다보니 이미 어른이 된 듯 했다. 그.. 2020. 8. 28.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