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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맛을 기록하는 법

by 구자범 2020. 7. 29.

 

 

맛을 기록하는 법

 

 

사물에 내재한 참된 맛을 ‘멋’이라고들 한다.

돌아가신 내 선생님 아르프 지휘자는 그야말로 멋진 분이셨다.

선생님은 음악을 제대로 하려면 청각뿐 아니라 모든 감각에 충실해야한다며,

그림, 시, 요리, 와인, 향수 등 온갖 것들을 가르치셨다.

 

하루는 당신을 ‘카푸치노 메이킹 일인자’라고 자칭하시며,

다방커피와 필터커피가 주류이던 90년대 한국에서 온 내게,

손수 에스프레소를 뽑아 카푸치노를 만들어 주셨다.

그 황홀한 맛에 반한 나는 곧 열심히 카푸치노를 배웠다.

갈아낸 콩 굵기, 우유 지방함유량, 거품비율, 컵 온도까지.

 

이년쯤 뒤 내가 정성껏 만든 카푸치노를 올려드리자,

선생님은 눈감고 그 맛을 한참 음미하시더니 눈을 짓궂게 한번 찡긋하고는,

마치 작위 수여식을 하듯 엄숙한 목소리로

“그대에게 ‘카푸치노 메이킹 이인자’ 칭호를 하사하노라!”라고 말씀하셨다.

난 행복했다.

 

졸업 후, 하겐이란 도시에서 지휘하던 내게 이탈리아에서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선생님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렸다.

“자범, 너 앞으로 이인자라고 말하면 안 돼.

여기 오페라극장 앞 조그만 카페 주인이 일인자다.

내가 이인자로 밀렸으니까 넌 이제 삼인자야!”

 

졸지에 삼인자가 된 나는 불행히도 그 일인자의 카푸치노 맛을 평생 알 수 없다.

선생님이 드셨던 그 맛은 기록되지 않았고, 기록할 방법도 없다.

소리나 빛은 그 ‘파동’이 내 몸의 입자와 만날 때 인지되지만,

맛이나 냄새는 그 ‘입자’가 내 몸의 입자와 만날 때 인지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동으로 드러나는 예술인 미술, 음악, 연극, 영화 등은 마그네틱 테이프나 컴퓨터 파일로 기록이 가능하나,

입자로 이루어진 음식이나 향수 등은 그것이 아무리 ‘예술적’이어도 기록이 불가능하다.

물론 최근 ‘양자 얽힘’을 이용해 입자를 전송하려는 시도가 있지만,

영화 스타트렉의 순간이동 축소판을 만드는 것처럼 매우 어려울 뿐더러,

성공한다 하더라도 전송과 기록은 또 다른 것이므로 입자 기록은 불가능하다고 해도 별 무리 없을 것이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세계는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다가,

‘만나’면 (과학용어로 ‘관측’되면) 비로소 입자로 드러난다.

우리말 ‘만나다’는 ‘맞다’를 뿌리로 하는 ‘맞나다’가 변한 것이다.

즉 마주치고, 마중하는 ‘맞남’이 ‘만남’이 되었다.

신기하게도, 입자가 서로 만남으로써 생기는 감각에 관한 우리말은 그 발음이 ‘맞’과 똑같다.

미각과 후각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인데,

미각의 경우는 ‘맛’보고, 후각의 경우는 냄새 ‘맡’는다.

 

맛은 내 안으로 들어와 맞부딪힌 고유한 만남이다.

파동은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전파되므로,

그와 만나 생성된 감각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입자로 만난 감각은,

내 점막 속의 고유한 개별 입자가 다른 개별 입자와 맞부딪혀야만 비로소 나타나는 나만의 것이기에,

너무나도 특별하다.

한번 만나고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것이기에 더없이 소중하다.

 

몇 년전 선생님이 암으로 돌아가셨다.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되었다.

그 이듬해 내 생일 0시 정각,

근 20년간 연락없던 옛 하겐극장의 동료 지휘자 프릿취로부터 생일 축하 겸 안부를 묻는 긴 문자를 받았다.

어떻게 내 전화번호와 생일을 알았으며, 웬일로 독일에서 한국시간 0시에 딱 맞추어 문자를 했냐고 묻자,

그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르프 선생님과 음악콩쿠르 심사위원으로 만났단다.

우연히 내 얘기를 하게 되었는데, 곧 돌아가실걸 이미 감지하셨던 선생님이

‘수십년간 빠짐없이 자범 생일마다 문자를 보냈었는데,

내가 세상을 떠나면, 혹시 당신이 대신 깜짝 문자를 보내 줄 수 있겠느냐’

라고 부탁하셨다는 것이다. 

 

난 가슴을 움켜잡고 한참을 울었다.

원래 멋은 맛에서 왔고, 맛은 입자의 고유한 만남이니 기록할 방법이 없었는데,

나의 선생님은 멋을 파동의 고유한 만남으로 가슴 속 깊은 곳에 기록하는 법을 이렇게 가르쳐주셨다. 

 

 

 

 

구자범

[한겨레  칼럼 '숨&결' 원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