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랑콜리가 필요한 사회
얼마 전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다이빙 벨’이란 작품이 상영되었다.
불과 200여석짜리 상영관에서 단 두 번 상영되는 것이다.
첫 회는 평일 오전 상영인데도, 일찍부터 매진이어서 기자들도 관람하기 어려웠단다.
표를 못 구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밖에서 발을 굴렀다는데,
관계자랍시고 내가 막상 안에 들어가 보니 자리는 텅텅 비었다.
예전에 영화 ‘변호인’을 상영할 때 누군가 표를 사재기를 했다가 상영 직전 취소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골탕 먹인 일이 있었다는데,
이번엔 또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영화를 보고 나와, 이곳에 와서 알게 된 ‘진짜’ 기자 한 분에게 영화평을 기대하며 물었다.
“어떻게 보셨어요?”
그가 한숨을 푹 쉬더니 머뭇거리며 말한다.
“언론인으로서 부끄럽지요.”
그는 매우 우울해 했다.
난 예상치 못했던 그의 첫마디가 하도 인상적이고 감동적이어서 대낮부터 얼른 그를 끌고 가 한잔 기울였다.
술 낚시에 월척이 걸렸다.
나는 요즈음 뜻있는 사람들을 찾아 한 잔 기울이며 산다.
바닷가에서 살기 시작한 이후 많은 사람들이 잔 기울이려고 일부러 찾아오기도 한다.
나를 보고 싶다는 핑계로 사실은 바다를 보러 오는 것임이 틀림없지만,
그래도 나는 그저 모른 척 잔을 기울일 뿐이다.
그런데 최근 나와 잔을 기울인 뜻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심각하게 병적으로 우울해 한다. 남들이 보기에 번듯한 직장을 갖고 멀쩡히 잘 살 것 같은 사람들이 말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을 만들어 보려고 이토록 치열하게 살아왔는데, 사회는 오히려 거꾸로 후퇴하니 계속 자괴감만 쌓이고,
특히 이런 엉망인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여주며 ‘내가 이런 사회를 만든 기성세대’라고 말하기에 너무 부끄럽다는 것이다.
이들은 하도 우울해서 다들 무기력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난 이 우울한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누구나 편지를 펜으로 써서 우표 붙여 보내던 시절, 독일 극장에서 좀 놀랐던 적이 있다.
남자가 보낸 걸 제외하면, 피아노를 연주하고 나서 받는 팬레터 수가 오페라를 지휘하고 나서 받는 팬레터 수의 다섯 배 이상이 될 정도로 월등히 많았던 것이다.
‘어? 피아노는 혼자 치는 거니 누구나 뚱땅거릴 수 있지만,
오페라 지휘는 최소 백 명 이상을 이끄는 건데...
원래 동물들 세계에선 수컷이 권력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면 암컷이 더 매력을 느끼는 거... 아닌가?’
궁금했다.
왜 그저 외로이 피아노 건반을 두들기고 있는 수컷에게 더 많은 팬레터가 쏟아지는 것인지.
몇 년 후, 대학시절 미학회를 함께 했던 김동규 박사가 독일에 잠시 왔을 때,
그가 ‘멜랑콜리로 인류 문화사를 다시 써보고 싶다’고 하길래
영화 ‘글루미 선데이’의 피아니스트를 소재로 멜랑콜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는 재미있는 상상을 하게 되었고 내 오랜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
‘멜랑콜리’란 원래 검은 담즙이다.
멜라닌 색소가 검다는 것을 생각하면 금방 이해가 되는 쉬운 말이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나라에 사상의학이 있었듯이 옛 그리스에서도 인체에 네가지 액체가 있다고 했는데,
그 중 검은 담즙이 ‘우울’과 상관이 있다고 보았단다.
그런데 이 우울하다는 멜랑콜리가 왜 인류 문화사를 다시 쓸 만큼 특별한가?
언제인지 모를 과거의 순간으로 상상의 날개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 보자.
옛날엔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수컷도 가장 강한 수컷이 되기 위하여 싸웠다.
암컷 유전자의 속성이 가능한 한 가장 강한 수컷을 발견해 내어 그의 유전자를 받아 번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인간 세계에도 또 가장 강한 수컷이 나타났다.
그 수컷 인간은 힘으로 다른 모든 수컷을 물리치고 온갖 암컷 인간과 부를 차지하였다.
싸움에서 진 다른 수컷들은 호시탐탐 그 강한 수컷의 자리를 노리든가, 아니면 찌그러졌다.
그중 가장 힘없는 유전자를 가진 수컷들은 평생 암컷을 만날 수도 없고, 제대로 먹을 수도 없었다.
이런 찌질이 수컷들은 우울했다.
그들은 저쪽 어딘가 잘 보이지도 않는 구석탱이에 찌그러져 있었다.
그런데 그 중 어떤 할일없는 수컷이 ‘이게 아닌데...’라며 꿈같은 말을 읊조렸고,
운율이 생기며 시가 되고 노래가 되었다.
사냥에 쓰지도 못했던 활을 붙잡고 퉁퉁 튕겨보며 처량히 놀다보니 연주가 되었다.
혹시 담배라도 있었다면 두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꼬나물고 똥폼을 잡으며 시간을 때웠을 게다.
하여간 시와 음악이 없던 시절, 예술은 이렇게 탄생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우연히 어떤 훌륭한 암컷이 그 수컷의 우울한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묘한 매력을 느낀다!
보통, 감정이란 그대로 전달되게 마련이다.
웬만해서는 옆의 누군가가 기쁘면 나도 기쁘고, 누군가가 슬프면 나도 슬프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우울’이라는 것은 전혀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남의 우울함이 나에게 똑같이 우울함으로 옮아오지 않고,
도리어 매력으로 바뀌는 것이다.
우울증은 꿈을 가진 사람들만이 지닌 병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의 ‘우울에서 꿈을 보고 매력을 느끼는 미적 쾌감’을 나는 이제 멜랑콜리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 암컷도 아마 스스로 놀랐으리라.
‘뭐지, 이 매력은?
이건 분명 모성애도 아니고 동정심도 아니야.
저 수컷은 그저 생존경쟁에서 밀려난 찌질이일 뿐이잖아.
근데 저 우울이 나에게 묘한 매력을 주네!’
결국 그 암컷은 용기를 내어, 아니 새로운 본성에 이끌려,
그 수컷에게도 번식의 기회를 준다.
반드시 육체적으로 힘있는 수컷의 유전자만 우수한 게 아니라,
저렇게 우울해서 활이나 퉁기며 꿈같은 이야기를 노래하는 수컷의 유전자도 우수한 유전자일 것이라 여긴 것이다.
이때부터 인류사는 바뀌기 시작했다.
힘있는 수컷들은
‘말세다. 세상에 저토록 아름다운 암컷이 저런 찌질한 유전자를 나누어 받다니...’
라며 웅성웅성(雄性!)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암컷에 의해 수컷의 서열은 이미 바뀌어 갔다.
‘이게 아닌데...’라는 꿈이 새로운 종류의 힘이 되었다.
그들은 홀로 고통을 겪는 우울한 생활을 오래 해오며 그간 별별 꿈같은 생각을 많이 해본 터라,
적어도 ‘생각’하는데는 확실히 유리했다.
그러니 힘이 있어서 별로 생각할 필요가 없었던 육체적으로 우월한 유전자의 수컷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저것 다 떠나서,
적어도 훌륭한 암컷들이 적극적으로 저런 찌질이들을 좋아한다는데 버틸 수 있는 수컷은 없다.
시간이 지나고, 결국 수컷들의 서열은 완전히 바뀌어 옛날엔 힘없던 수컷들이 세상을 지배한다.
(신기하게도 암컷들의 서열은 몇만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절대 바뀌지 않는다.)
그들은 꿈을 팔아먹으며,
원래 육체적으로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수컷들을 슬슬 가지고 놀기 시작한다.
어르기도 하고 봐주기도 한다.
주종관계의 종을 가리키던 독일말 ‘하인’인 크네히트(Knecht)가 ‘기사’라고 하는 영어의 나이트(Knight)로 되었듯이,
그들을 하인으로 삼긴 하지만 딴 생각 못하게 이리저리 자존심은 챙겨준다.
그들은 이제 꿈꾸던 소질을 살려 소프트웨어를 팔아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고,
노래나 이야기를 팔아 힘을 얻는 등,
상상할 수도 없던 일들을 해낸다.
반면 원래 최고의 우성인자를 보유한 수컷들은 이제 좋은 쪽으로는 격투기를 하지만,
운이 없으면 나쁜 쪽으로 조폭이 된다.
그러니 문신한 조폭들이 굳이 자주 대중 목욕탕에 나타나고 싶어하는 이유는 누구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알몸인 상태에선 원래의 자연적 서열관계를 느껴 볼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찌질이들은 수십만년 동안 한없이 당해만 왔기에,
이번에 간신히 바뀐 서열관계를 절대로 놓칠 수 없었다.
그래서 힘이란 개념을 진짜 힘이 아닌 추상적 힘으로 대체하고 사회를 유지해 간다.
마치 모두에게 웬만한 것은 다 똑같이 인정해 주는 것처럼.
일부일처제를 만들고,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종교를 공인한다.
하지만, 이들은 사회를 지배하다보니 자기가 본래 찌질이었다는 것을 곧 잊어버리고 마치 힘있는 우성인자를 가지고 태어난 걸로 착각하고는,
못된 머리를 굴리며 옛날에 진짜 우성인자를 가진 수컷이 모든 것을 다 차지하고 횡포 부리던 것보다 더 악랄한 짓을 서슴지 않고 해댄다.
결국 그런 나쁜 이들 때문에 찌그러져서 우울해하는 이들이 또 다시 잔뜩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른바 사회의 왕따이다.
그런데 끔찍하게도 이들보다 훨씬 더 우울한 자들이 있으니, 그 ‘왕따 중의 왕따’이다.
사회의 왕따들이 자기가 왜 우울한지 그 근본적인 이유에 전혀 무관심한 것을 보며 답답하다고 말하다가,
어이없게도 그들에게마저 따돌림을 받는다.
이들은 결국 이중의 답답함 때문에 더욱더 우울해져간다.
게다가 이들의 습성은 좀 특이해서 비열하게 살려고 버둥대지도 않는다.
안타깝게도 그저 극심한 우울함으로 죽어갈 뿐이다.
멸종 위기다.
진짜가 매력적인 것이지, 매력적이라고 다 진짜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힘센 수컷에게만 붙어살던 암컷이 어느 순간 힘없는 수컷의 우울함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가 과연 단순히 ‘매력’의 발견 때문만 이었을까.
서로 때려죽이고 노예삼는 사회에 살던 예수가 ‘원수도 사랑하라’라고 말한 것을 보고,
그가 바로 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한 말이었다고 믿는 사람도 있지만,
적어도 자신의 온 삶을 걸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정녕 우리가 신의 아들이라고 부를 만하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마찬가지로 최초의 멜랑콜리를 느낀 훌륭한 암컷도 어쩌면,
저 정도로 강력한 매력이 나타났다면 적어도 그 우울함 속의 꿈이 ‘진짜’임에 틀림없으리라는 믿음이 있지 않았을까.
아, 지금 우리에게 우울에서 꿈을 발견하고 진짜라고 믿었던 그 암컷의 현명함만 있다면!
아니 많이 비약해서,
좀 고급스럽게 괴테가 파우스트의 마지막에서 말한대로 ‘영원한 여성성’이 있다면!
괴테가 그냥 ‘일반적 암컷들의 습성’이라고 하지 않고, ‘영원한 여성성’이라고 한 건,
혹시 그 ‘영원한 여성성’이 일반적인 동정심도 모성애도 아닌,
힘없는 자에게도 눈을 돌려 그들의 ‘우울에서 진짜를 보고 감싸 안는 능력’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사이버 망명이라는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지는 사회가 되었다.
누군가가 남의 사생활을 들여다보다가 맘에 안 들 경우 처벌하겠다고 하면,
절대로 그런 ‘못된’ 짓을 못하도록 막을 생각부터 하진 않고,
일단 안 보이는 곳으로 지레 도망부터 한다.
이럴 땐,
적어도 싸워보다가 호되게 당해서 할 수없이 어딘가 멀리 구석탱이로 쫓겨나 찌그러졌던 옛날 힘없던 선배 수컷들보다도 못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또 우울해진다.
하지만 ‘거짓말의 발명’이란 영화에서 한 사람이 발명한 거짓말이 인류문화 전체를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상상처럼,
그저 어떤 우울한 사람이 꿈꾸었던 노래 하나가 멜랑콜리로 인해 인류의 질서를 바꾸었으며 또 앞으로 바꿀 수도 있다는 상상을 자꾸 하게 된다.
어쩌면 정말 우울이 세상을 바꾸는 최초의 힘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시대에도 우울을 매력적으로 느끼는 멜랑콜리가 필요하다.
이 시대에 왕따 중의 왕따인 우울한 이들의 꿈이 어떤 영원한 여성성에 의해 ‘진짜’로 드러나게끔 하려면.
얼마 전, 매우 우울해하고 있는 내 소울(술) 메이트인 부산대 유인권 교수에게 술을 따르며 고백했다.
“내가 만약 이 사회의 가짜와 거짓과 타협하고 산다면,
적어도 당신은 분명 금방 알아 챌 것이고,
나는 그 모습이 당신에게 매우 부끄러울 것입니다.
그래서 부끄러워할 거울로서의 당신이 있기에,
적어도 당신에게 부끄럽지 않으려고 나는 타협하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결국, 당신이 나를 살게 하는 사람입니다.
내 존재 이유입니다.” 라고.
그도 나에게 똑같이 말했다.
바로 자기도 그러하다고.
우린 부둥켜안고 울었다.
며칠 전엔, 치열하게 살고 계신 중학교 선생님 한 분이 나에게 문자를 보내왔다.
이 사회에서 우울함을 이젠 정말 견딜 수 없다고.
그 분에게도 문자 답장 대신 똑같이 이 말을 전한다.
“이 사회에서 우울해 하는 벗들이여.
나는 당신의 우울에서 꿈을 보고 진짜를 보기에, 그에 매력을 느낍니다.
당신의 우울이 나를 살게 하는 힘입니다.
내 존재 이유입니다.
인류 문화사를 바꿨던 멜랑콜리와 함께, 찌질이 올림.”
구자범의 제길공명 [6] 한겨레 칼럼 원본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높이와 품격 (0) | 2014.11.15 |
---|---|
믿고 놀기 (0) | 2014.11.01 |
어색함에 익숙한 사회 (0) | 2014.10.04 |
궁금해하지 않는 사회 (0) | 2014.09.20 |
템포 모데라토 (0) | 2014.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