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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어색함에 익숙한 사회

by 구자범 2014. 10. 4.


어색함에 익숙한 사회



내가 중학생 때는 항상 머리에 빛나는 후광을 달고 다니시던 분이 주창하신 ‘질서운동’이란 걸 해야 했다. 

이른바 ‘선진조국 창조’라는 위대한 꿈을 실현하겠다는 그분의 투철한 의지를 듬뿍 담아 하사하신 고육책, 아니 교육책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열심으로 참여했다. 

그런데 그 질서운동이란 건 기껏해야 운동장에서 뜨거운 태양 아래 흙먼지를 마시며 학급별로 군인처럼 번호 붙이며 줄 맞춰 걸어가다가 ‘우로 봣!’이란 구령이 떨어지면 교장 선생님이 계신 연단을 향하여 동시에 우로 보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래도 그런 훈련을 받았던 덕에 우리는 지금도 웬만하면 동시에 ‘우’로 보는 것에 별 거부감을 못 느끼는 혜은을 입었다.


그 때 우리 반에는 이런 선진조국을 창조하는데 매우 저해가 되는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는 지도지침에 ‘거수경례를 할 때는 오른손을 똑바로 펴고 검지와 중지 사이를 눈썹 끝에 힘있게  붙인다’라고 나오는 그 눈썹을 ‘속눈썹’으로 굳게 믿은 덕분에, 

경례 구령에 맞추어 손가락으로 힘차게 눈을 찔러 병원에 가야했던 놀라운 내공의 소유자였다. 

그는 나중에도 다시 한 번 우리를 놀라게 했는데, 

바로 발 맞춰 행진할 때 큰소리로 네 박자의 번호를 붙이며 걸어가면서도 발은 세 박자로 딛는 신공을 구사한 것이다. 

이는 다른 어설픈 친구들처럼 첫걸음에서 왼발이 올라갈 때 왼손도 같이 올라가거나, 

우향우를 할 때 오른 손바닥에 ‘우’자를 적어놓고도 왼쪽으로 돌아서고는 나중에 ‘아차!’하며 이마를 치는 수준이 아니었으므로, 

선생님들의 몽둥이찜질 정도로는 그의 신공을 꺾을 수 없었다. 

그는 결국 교장 선생님 앞에서 학급별 평가를 할 때 혼자 열외되어 시원한 교실에서 여유있게 도시락을 까먹으며 학우의 가방을 지키는 특혜를 얻었으니, 

당연히 우리들은 그의 4대 3 걷기 신공을 우러러 볼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어렸던 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입으로는 큰소리로 ‘하낫, 둘, 셋, 넷!“을 외치면서 발로는 땅을 세 번 딛는데도 어떻게 자기는 하나도 어색해 하지 않을 수 있는지.



그가 잊혀져갈 무렵인 삼십대 초반, 나는 독일에서 한국 드라마 비디오 테잎을 빌려 향수를 달래다가 다시 그를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 드라마에는 가족들이 모여 생일 축하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있었는데, 

모두 이 곡을 ‘두 박자’로 손뼉 치며 어색하게 노래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처음엔 피디가 일부러 그 가족들이 좀 모자라 보이도록 연출한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워했다. 

하지만 한국에 들어와서 실제로 전 국민이 그렇게 생일 축하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며, 

나는 오히려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노래라는 이 곡은 원래 ‘세 박자’로 된 다음과 같은 곡이다. [악보1]





그런데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 사람들만 다음과 같이 변박으로 바꾸어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만일 다른 나라 지휘자에게 이 악보처럼 지휘해 보라고 하면 분명 대중적인 곡 치곤 참 현대적이라 생각할 터이니, 

정녕 우리 민족 고유의 음악성을 완벽하게 구현한 현대음악으로의 자랑스러운 변신임에 틀림없다. [악보2]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렇게 변형한 것도 모자라, 심지어 마디에 상관없이 계속 ‘두 박자’로 손뼉 치며 노래하는 신공을 구사한다. 

위의 악보를 변박이 없도록 두박자로 풀면 다음과 같은 악보가 되는데, 

여기에 손뼉치는 부분을 ‘V’로 표시해 보면 참 어처구니가 없다. 

(심지어 노래가 끝난 마지막 마디에도 악보처럼 진짜로 손뼉을 친다.) [악보3]





못갖춘 마디를 없애고 시작하여 첫 번째 ‘생일’에서 손뼉을 쳤다면, 

마찬가지로 누구나 두 번째 ‘생일’에서도 손뼉을 치고 싶은 것이 정상적 심리이다. 

그러니 악보를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악보3]의 4번째 마디처럼 정박에 치는 손뼉과 상관없이 빈손으로 ‘생일’을 부르는 건 엄청난 내공이 필요하다는 데에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훈련된 프로 음악가급의 내공을 가졌든가, 아니면 아예 음악의 가사와 박에 철저하게 무심하다는 것 둘 중 하나일 터인데, 

솔직히 나로선 전자일거라고 믿기는 어렵다. 

아, 이쯤 되면 내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했던 중학교 친구에게 매우 미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친구여, 그대만 ‘박’에 무심한 게 아니었도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토록 어려운 방식으로 노래하는 이유는 내가 보기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관사나 전치사가 없어 노래를 못갖춘 마디로 시작할 필요가 없는 등등의 우리 말 특성 때문이다. 

둘째, 우리가 서양음악에 너무나 함부로 가사를 붙이고 살아오면서 그에 세뇌되어,

원 노래와 말이 전혀 어우러지지 않아도 어색함을 못 느낄 만큼 무심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말은 관사나 전치사가 없을 뿐더러 조사나 어미를 길게 발음하므로, 

이 노래를 작곡한 사람에겐 대단히 미안하지만, 

우리에겐 못갖춘 마디로 시작해서 ‘해피 버!쓰데이 투 유’라고 하지 않고 정박으로 시작해서 ‘생!일 축하합니다’라고 하는 것도 ‘생일’을 강조하는데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합니다~’라고 말의 끝을 갑자기 세 박자로 길게 하는 것도 크게 어색하지는 않다. 

사실 나는 처음엔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일 축하노래를 이렇게 부르는 모습이 많이 창피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말 고유의 특성을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이 보여 가상하다고 느낀 다음부터는,

 제발 손뼉만 치지 않는다면(!) 국민 모두가 이런 엄청난 변박을 구사하며 노래함으로 세계인에게 우리 고유 언어와 음악의 일치를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순간 생일노래 손뼉과 중학교 친구 신공의 미스터리는 동시에 풀려버렸다.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설마 하나같이 박치일 리는 없다. 

우리들에게 대부분 좋은 리듬감이 있다는 것은, 네 박자로 된 두 마디의 리듬구조란 말을 안 가르쳐 줘도 ‘대~한 민!국! 짝짝-짝 짝! 짝!’하고 일사분란하게 손뼉 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된다. 

그러니 생일 축하 노래를 어색하게 한 이유는 다들 박치라서 그런 게 아니라, 

마치 농구 골대 앞에서 ‘왼손은 그저 거들 뿐’이란 명언처럼, 

우리말에 자연스럽도록 변박으로 노래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손뼉은 그저 ‘무심히’ 흥을 내려고 거들었을 뿐이기 때문이리라. 

마치 내 중학교 친구가 ‘걷는’데 집중하며 번호 붙이기로써 거든 게 아니라, 

오로지 ‘번호 붙이기’에 집중하며 그저 무심히 걸음으로써 거들었듯이. 


물론 이렇게 아무리 변명해도 원래 노래는 세박자이고, 우리의 노래가 어색한 건 어색한 거다. 

그래도 생일 축하노래는 어차피  외국어로 된 다른 나라 노래이니, 

한국식으로 ‘토착화’한 이런 어색함은 좀 덜 부끄럽다. 

하지만 진정 우리 고유의 노래여야 하는 애국가의 어색함은 정말 견딜 수없이 너무 부끄럽다.



최초로 독일에서 인정받고 활동했던 한국 음악가는 아마도 ‘안익태’란 분일 것이다. 

당시 독일에선 일본인으로 알려진  ‘에키타이 안’이란 분과 동일인이라는데, 

지금 이 글에선 그 쪽에 관심 둘 생각은 별로 없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매우 성스러운 표정으로 부르는 찬송가들 중엔  미국에서 인디언 때려죽이려고 출정할 때 불렀던 군가들이 있다 해도 다들 별 관심이 없듯이, 

나도 여기선 안익태란 분이 작곡했다는 우리 애국가에 관심이 있을 뿐, 

일본을 위해 만주 환상곡을 작곡했던 에키타이 안이라는 분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다. 

사실 만주의 군관학교를 가기 위해 일본천황에게 충성의 혈서를 썼다는 다카키 마사오란 분도 아직까지 드높이 칭송받는 나라에서 살면서, 

그깟 음악 하나 일본을 위해 작곡했느니 안 했느니를 두고 따지는 것은 너무 낯간지럽다.   

  

나는 그저 그 분이 작곡한 국가가 ‘우리’ 노래라고 하기엔 너무도 창피하기 때문에 화가 날 뿐이다. 

그 분은 우리나라 국가의 첫 도입부를 이렇게 작곡해 놓으셨다. [악보4] 



그 분이 작곡하신 노래는 현재 어떤 애국자들에겐 음정을 이렇게 3도 낮추어 부르는 것조차 국가 모독죄 정도에 해당한다고 느껴질 만큼 성역화 되어있다지만,

그런 무서운 초 절대음감의 애국자들도 하나같이 그 신성한 노래를 이렇게 부른다. [악보5]




이건 이 애국자들의 잘못이 아니다. 

우리말에 무심했던, 노래와 말이 일치하는 것에 눈곱만큼도 관심 없이 ‘올드 랭 사인’ 비스무리 아무렇게나 갖다 붙였던 작곡가의 잘못이다. 

물론 그동안 말도 안 되게 끔찍한 국적불명의 노래를 우리 가곡이랍시고 작곡했던 수많은 다른 작곡가들도, 

적어도 우리를 대표하는 국가를 작곡한 건 아니라는 점에서는 좀 관대하게 봐줄 수 있긴 하나, 

이 맥락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하지만 매번 누군지 모를 ‘해물’과 ‘두산’이를 목 놓아 부르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우리들, 

즉 우리 국가의 맨 처음부터 우리말과 노래가 안 맞아도 전혀 어색한 줄 모르는 우리들의 무심함이란 잘못도 그냥 넘길 수는 없다. 

사실 우리가 ‘해물’과 ‘두산’이를 더 이상 애타게 부르지 않으려면, 간단하게 ‘점’ 하나만 옮기면 된다. 

‘동해물과’에서 흉측하게도 ‘해’에 붙어있는 불쌍한 점을 ‘동’으로 옮겨 붙이면 되는 것이다. 

바로 뒤에 나오는 ‘하느님이’에서 점이 ‘느’에 붙어있지 않고 정상적으로 ‘하’에 붙어있는 것처럼 말이다. 

적어도 우리말을 알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원래 이렇게 작곡해서 부르는 게 너무도 당연하다. [악보 6]




나는 작곡가의 친일 행적 논란이고 뭐고 다 떠나서, 

통일되어 새로 국가가 제정되는 날까지는 줄기차게 불러야 할지도 모를 이 노래를, 

제발 첫 음에 점 하나만 옮겨서 한국 사람답게 불렀으면 좋겠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라는 유행가처럼 의미가 바뀌는 것도 아닌데, 

점 하나만 옮겨서 우리말과 노래가 일치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어색하고 창피한 ‘해물과 두산이’가 아닌 자랑스런 ‘동해물과 백두산’을 부를 수 있다면 매일 부르래도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국가마저 이러니, 우리는 이제 말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모든 것에 별로 어색함을 느끼지 못한다. 

세뇌되어 그렇고, 그에 따라 무심해져서 그렇다. 

요즈음 나오는 걸그룹들이 춤추는 것을 보면, 가사는 분명 ‘나는 애인과 헤어져서 매우 슬퍼!’라는 내용인데, 헤어진 애인이 미국사람이었는진 몰라도 뜬금없이 중간에 영어로 쏼라쏼라 하면서 계속 다리를 벌렸다, 꼬았다, 누웠다, 쓰다듬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아마도 사회가 흉흉해져서 누구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다보니, 요즈음은 실연해서 슬프면 저런 병적인 동작이 저절로 나올 지도 모른다고 아무리 믿어보려 해도, 납득하기는 매우 어렵다. 

어쨌든 안타깝게도, 노래를 작곡할 때 가사와 상관없이 먼저 멜로디를 만들고, 그 만들어진 멜로디에 아무 가사나 붙이고, 그 가사를 노래하면서 그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춤을 추는 ‘삼종 따로’를 선보여도, 이젠 그걸 어색하게 느끼는 사람이 별로 없다. 



내겐,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생각과 그에 따른 말과 거기에 상응하는 행동이 웬만해선 일치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누구에게든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못’하는 갈등의 순간엔 매번 깊은 고뇌가 있을 것으로 믿었고, 

그 고뇌는 그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에게도 인간적인 연민을 불러일으킬 거라 믿었다. 

그래서 아내의 외도 장면을 좀 전에 목격하고서도 곧 무대 위에 올라 코미디 연기를 해야 하는 광대가 그 자신에게, 

‘네가 이러고도 인간이냐? 하하하, 아냐, 넌 광대일 뿐. 사람들은 웃으려고 이미 돈을 지불했어. 광대야, 찢겨진 사랑에도 웃어라.’

라고 노래하는 오페라 <팔리아치>의 아리아를 들으며 같이 아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삼종 따로’의 순간에도 고뇌하긴 커녕 하나도 어색해 하지 않는 사회에 살다보니,

그 믿음이 점점 깨져간다. 

정상화하겠다던 사람이 거꾸로 더 비정상을 만들어도 전혀 어색해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에게 정상화하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어색하다고 보기까지 한다. 

이젠 어떤 게 진짜 어색한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실제로는 무심한데도 제대로 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다. 

난 생일 축하 노래나 애국가를 듣다가 문득 겁이 난다. 

어느 하나에 집중한답시고 다른 건 그저 무심하게 거들고 있는 나의 모습이, 

내겐 무척 자연스럽게 느껴질지 몰라도, 

사실은 남보기 부끄러울 정도로 매우 어색한 모습은 아닌지 말이다.



구자범의 제길공명 [5] 한겨레 칼럼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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