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부를 요청하는 사회
내가 예전에 있었던 독일 하겐 오페라 극장의 무대입구 벽에는 ‘토끼 발’이 하나 걸려있었다.
왜 징그럽게 이런 게 걸려있냐고 물어보니, 공연을 망치지 않도록 행운을 가져다주는 부적이란다.
실제로 서양에는 지금도 살아있는 토끼의 발을 잘라 장식용 브로치나 열쇠고리 등을 만들어 부적으로 차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독일어권의 모든 극장에서는 첫 공연 시작 전에 ‘토이,토이,토이(toi,toi,toi)’라고 적은 쪽지와 조그마한 선물을 부적처럼 주고받는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잘하라며 어깨에 대고 ‘토이,토이,토이’라고 말한다.
그걸 고마워하며 '당케'라고 대답했다가는 또 난리가 난다. 주문의 효험이 없어진다나?
절대 고맙다고 하지 말라고 당부하며 다시 해준다.
눈치 빠른 사람은 금방 알아챘겠지만, 이 주문은 바로 ‘퉤, 퉤, 퉤' 침 뱉는 소리이다.
마치 고사 지내기 전에 ‘고수레’를 하는 것 같은 참 귀엽고 재미있는 전통이다.
그런데 유럽 극장의 전통 중에는 이처럼 공연 전에 서로를 격려하는 장난스런 부적 말고도 평소에 무대 위에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엄격한 ‘터부(금기)’가 있다.
현대 사회에 유럽 오페라 무대처럼 터부가 많은 곳이 또 있을까?
무대 위에서는 연출이 아닌 한 절대로 음료를 마셔도 안 되고, 모자를 써도 안 되고, 외투를 입어도 안 된다.
휘파람을 불어도 안 되고, 무대를 가로질러가도 안 된다.
이 밖에도 ‘안 되는 것’이 외우기 힘들 정도로 많다.
나는 극장에 들어간 초기에 무대 리허설 시작 전 아무 생각 없이 커피 한 잔을 들고 외투를 입은 채 피아노가 있는 곳까지 무대를 가로질러 갔다가,
거기 있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거의 중범죄인 취급을 당하며 정신이 나갈 정도로 혼난 적이 있다.
그 이후 왜 이렇게 많은 터부들이 있냐고 묻는 내게, 극장의 원로들은 마치 무슨 ‘안전성’ 때문인 양 설명하곤 했다.
예를 들면 ‘옛날 극장에서는 휘파람 신호로 무대의 기계장치를 움직였기 때문에 잘못하면 오해해서 사고가 날 수가 있다’거나, ‘음료를 바닥에 흘리면 미끄러져서 다칠 수 있다’는 식이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단지 이런 이유만으로 공연관계자들이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 수많은 터부가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아마 이런 터부의 기원을 찾아보면 결국 고대의 제전으로 소급될 것이다.
고대에는 주술과 예술이 구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전이 이루어졌으므로, 제단과 무대의 유사성이 있으리라는 것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그러니 제단의 신성함을 유지하고자 했던 여러 요소가 무대에 투영되어 지금도 남아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종교와 예술이 분리된 현대사회에서는 그것이 그저 조심스레 지키는 ‘에티켓’ 정도로 충분하지,
절대 어기면 안 되는 무시무시한 ‘터부’여야 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21세기 과학시대에 도대체 누가, 왜, 이 터부라는 미신을 전통처럼 존속시키는 것일까?
이 궁금증은 무대 위 음악가들의 예민한 자존감을 마주하면서부터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문제: 소프라노 가수와 테러리스트의 차이점은? 답: 테러리스트와는 협상이 가능하다.”
이런 유명한 농담이 있을 정도로 모든 음악가들은 자존감에 예민하다.
사실 그런 자존감도 없다면 그냥 녹음된 옛날 거장의 음악을 들으면 되지 굳이 자기가 똑같은 음악을 할 필요도 없는 것이므로, 그 자존감은 매우 중요하고 정당하다.
하지만 이 자존감은 여럿이 함께 음악을 할 때 종종 갈등을 낳을 정도로 강하다.
독일에서 나와 친했던 음악가 중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오페라 가수로 예를 들자면,
이중창을 할 때 옆 가수 성량이 작으니 당신도 좀 작게 내달라고 부탁할 경우,
대부분은 따로 찾아와 양손을 벌리고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한다.
이런 난처한 얘기할 때는 꼭 ‘마에스트로’라고 부르면서.
“마에스트로, 내가 이런 성량을 만들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세요? 저 상대역 성량에 맞추면 객석에 잘 들리지도 않아요. 관객들은 내가 노래를 못한다고 생각할 텐데, 왜 내가 저사람 때문에 무대에서 욕을 먹어야 하나요?“
이 정도의 자존감으로, 오페라 가수는 오롯이 자신이 무대의 중심이라 여긴다.
그리고 실제로 공연의 중심이기도 하다.
그가 아리아를 부를 때는 지휘자도 다른 때와 달리 ‘이끌어’ 가는 지휘가 아닌, 온전히 그의 능력과 조건에 따라 ‘맞추어’ 주는 지휘를 하고,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무용단, 무대 관계자 등 모두가 그에게 집중한다.
노래의 어려운 부분에서 이상한 동작이나 자세를 요구했던 괴짜 연출가만 제외한다면, 모두 그 가수의 편에서 응원하고 있는 것이다.
무대 위의 오페라 가수는 마치 월드컵 경기에서 승부차기를 하는 선수와 비슷하다.
그런데 자기의 몸을 악기삼아 소리를 내는 사람에겐 뜻대로 되지 않는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모든 사람이 그토록 응원하는 가수가 무대 위에서 갑자기 헤맨다면 그를 보는 관객도 쥐구멍을 찾고 싶을 정도로 당황스러운데, 그 당사자는 오죽할까.
남들이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아도, 그 강한 자존감에 상처받은 가수는 어떤 핑계라도 대고 싶을 것이다.
거의 매일 공연이 있는 독일 극장에서, 공연 후 가수들이 웃으면서 대는 핑계는 참 다양하다.
가장 흔한 ‘감기 기운이 있어서’부터 ‘의상이 자꾸 흘러내려서’, ‘상대가수의 입 냄새가 심해서’, 혹은 ‘수플뢰어(무대 밑에서 가사 앞부분을 일러주는 사람)의 소리가 안 들려서’, 심지어는 ‘무용수가 춤을 출 때 입으로 먼지가 들어와서‘에 이르기까지,
마치 핑계거리를 만들려고 밤마다 무슨 백과사전을 뒤져본 게 아닐까 할 정도로 별별 재미있는 것이 많다.
하지만 웃지 못 할 큰 일이 벌어져 이런 핑계도 댈 수 없고 순전히 자기가 책임져야 할 때,
거꾸로 남을 대놓고 욕함으로써 자신이 벗어날 수 있는 잔인한 탈출구가 하나 있으니,
바로 자기가 잘못한 이유가 어처구니없게도 누군가 터부를 어겼기 때문이라고 ‘마녀사냥‘을 하는 전통 아닌 전통이다.
한번은 슈투트가르트 극장에서 공연이 끝나고 무대 뒤에서 커튼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좀 전에 무대 위에서 박수 받을 때는 마치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사진 찍을 때 같은 미소를 짓던 주역 여가수가 무대 뒤로 쿵쿵대며 돌아와서는,
마치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마녀와 같은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큰소리로 온갖 험한 욕을 쏟아내더니,
자기 차례가 돌아오자 또 그 미스코리아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받으러 뒤뚱거리며 나간다.
그 욕을 들어보니, 맙소사, 아까 공연 전에 어떤 사람이 무슨 터부를 어겼기 때문에 자기가 노래를 잘하지 못했고, 그래서 지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지지 않는 것이란다.
하여간 지휘자가 위로할 수도 없고 동조할 수도 없게 만드는 아주 효과적인 기술을 그녀로서는 구사한 셈이다.
놀랍게도 유럽극장 무대 뒤에선 이런 일들이 믿기 어려울 만큼 많이 일어난다.
공연 전에 급하게 무대를 가로질러간 말단 직원이나 슬쩍 휘파람으로 첫 음정을 잡아 본 아마추어 객원 합창단원을 향해 공연이 끝나자마자 욕을 퍼붓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 그가 그날 공연을 제일 망친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이렇게 책임을 전가하는 일을 반복하다가 스스로 세뇌되어 나중엔 무섭게도 그 터부를 ‘진짜’로 믿기 시작한다.
바로 이들이 터부의 존속을 요청하는 장본인이다.
예로부터 민심이 흉흉해지면 그것을 무마하기 위해 불만을 터트릴 수 있는 약한 대상을 하나 골라 괴롭히며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
그에게 기득세력의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기득권을 보호하는 장치로 마녀사냥을 이용해 왔다고 문화인류학자들은 말한다.
작게는 마을의 가장 힘없는 과부를 마녀로 몰아 태워 죽이는 것부터, 크게는 관동대지진 이후의 조선인 학살이나 나치의 유태인 홀로코스트까지 다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 여가수가 스스로 마녀얼굴을 하고는 터부 운운하며 엉뚱한 사람을 마녀로 모는 뻔한 이야기를 그저 지겨워하며 흘려듣고만 있었던 나의 모습이 부끄럽기 그지없다.
어쩌면 그녀는 힘없는 마녀를 빙자해서, 이 공연 전체가 지휘자의 책임이니 자기가 노래를 못한 것도 지휘를 잘하지 못한 당신의 책임이란 말을 나에게 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사실 대부분 사람들은 지휘자와 달리 자기 파트 외에는 책임에 별 관심이 없다.
분명 이 여가수도 만일 그날 자기가 노래만 잘했다면, 그 밖의 모든 것이 엉망이었을지라도, 훌륭한 공연이었다며 행복해 했을 것이다.
실제로 하겐 극장에서는 처음 온 대역가수가 가사를 잊어먹고 헤매는 와중에 회전무대가 돌지 않는 등 아주 엉망이었던 공연 후,
자신의 매우 어려운 솔로부분을 처음으로 잘 연주해 낸 호른 주자가 내 방까지 눈치 없이 찾아와서는 싱글벙글 웃으며 성공적인 공연을 축하한다고 악수를 청한 적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자신의 조그마한 실수 때문에 공연을 망친 건 아닐까 괴로워하며 책임지려는 사람도 있다.
하노버 극장에서는 매우 훌륭했던 공연 후, 거의 모든 악기가 동시에 연주되는 부분에서 객석엔 잘 들리지도 않을 정도의 실수를 한 바이올린 수습단원이 쭈뼛거리며 나를 찾아와 울상을 하고 죄송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 오케스트라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그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잘하는 단원의 수준이 아니라 가장 못하는 단원의 수준이다.
하지만 그 오케스트라 수준의 ‘책임’은 가장 못하는 주자에게 있지 않고 궁극적으로 지휘자에게 있다.
그래서 나는 당시에, 책임은 당신이 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는 것이고, 사소한 것에 그토록 자괴감을 느낀다면 앞으로 무대에 서기 더 힘들어지니 제발 그러지 말라고 다독였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남들은 마녀를 찾느라 정신없는 극장에서도 자기의 작은 실수를 괴로워하며 찾아온 그 단원의 자괴감이 다른 어떤 자존감보다 내겐 더 멋있게 느껴진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돌아와 바다를 바라보며 ‘세월’을 보내는 요즈음엔 더더욱, 그렇게 스스로 괴로워할 줄 아는 사람이 많이 그립다.
지난 5월 23일, 봉하 마을에서 우연히 군대 동기를 이십여 년 만에 처음 만났다.
수백 명을 죽이고도 수십 년 째 멀쩡히 떵떵거리고 사는 사람과, 자신은 여러분이 추구할만한 가치가 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 괴로워하며 스스로 죽는 사람이 있는 우리 사회의 불편함을 이야기하던 중,
그가 막걸리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욕 많이 먹으면 사람이 오래 산다는 옛말이 왜 그런지 알 것 같아.",
"왜?",
"그런 사람은 스스로 괴로워할 줄 모르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안 받고 살거든. 아무렇지도 않게 욕먹을 짓을 계속하고, 그러고도 자기는 아무렇지도 않으니 오래 살겠지. 반대로 스스로 괴로워하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도 못 견디는 거고...“
스스로 괴로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터부를 요청한다.
그 터부를 어기는 사람이 나오길 바라면서, 심지어 특정인이 그것을 어기길 바라면서.
자기가 책임지지 않으려고,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고.
이런 책임을 떠넘기는 사회에 살다 보면, 슬프게도 점점 익숙해져서, 책임지지 않는 게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게 된다.
그러면 심지어 공정하게 책임을 묻던 선량한 사람조차, 작은 일에도 스스로 괴로워하며 책임지겠다는 사람을 보고는 오히려,
‘어, 책임을 지겠다고? 아, 그렇다면 저 사람은 내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더 어마어마하게 큰 잘못을 한 게 틀림없군!’
이라고 단정 짓기까지 하게 된다.
책임지는 사람이 책임지지 않는 사람보다 더 나쁜 놈으로 보이는 곳에 살아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스스로 책임을 지는 길은 여럿이다.
왕궁에서 섶에 몸을 눕히고 쓸개즙을 빨며 복수를 꾀했던 부차와 차라리 고사리를 캐 먹겠다고 산에 들어간 백이·숙제가 택한 책임지는 방식은 역사적 평가나 개인적 호불호가 크게 엇갈릴 만큼 극단적으로 달랐다.
그런데 이제 나는 그동안 쓸개즙에는 ‘용기’라는 관(冠)을 씌워주면서도 고사리는 ‘비겁’이라는 관(棺)에 함부로 묻어 버리지는 않았는지 신중히 돌아보게 된다.
구자범의 제길공명 (諸吉共鳴) - 모두가 좋은 함께하는 떨림
[한겨레 칼럼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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