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이야기

믿고 놀기

by 구자범 2014. 11. 1.



믿고 놀기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조차 이런 질문을 할 때가 있다. 

“지휘자가 오케스트라 앞에서 춤추는 건 그냥 ‘쇼’죠? 미리 다 연습을 해 놓았으니까, 사실은 지휘자가 없어도 되는 거잖아요?” 

나는 이렇게 되묻고 싶다. 

“만일 나와 전혀 연습이 안 되어 있는 오케스트라면요?”


지휘과에서 제일 먼저 가르치는 것이 처음 보는 오케스트라에게 아무 말 없이 춤만으로 전혀 다른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하는 바톤 테크닉이다. 

음악성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손가락이 안 돌아가면 피아노를 칠 수 없듯이, 

지휘봉을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면 오케스트라라는 악기를 맘대로 연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독일처럼 빡빡하게 연주 일정이 짜여져 있는 곳에선 단 한 번의 리허설만으로 연주를 하는 경우가 있고, 

심지어 그 한 번의 리허설조차 없을 때도 있기에, 

이 테크닉은 필수 조건이다. 


이쯤 되면 또 꼭 따라 나오는 질문이 있다. 

“에이, 정말 한번도 연습 안하고 공연을 지휘한단 말이에요?” 

바로 그렇다. 

그게 독일 오페라 극장의 시스템이자 전통이다. 

내가 여기서 함부로 이름 붙이자면, ‘음악적 상호 신뢰’의 전통이다.



내가 하노버 극장 지휘자가 될 때의 예를 들면 이러하다. 

극장장이 물망에 오른 후보 지휘자 4명을 초대해서 한 공연씩 맡겼다. 

지휘자에게는 공연이 곧 오디션인 셈이다. 

나는 푸치니의 <라보엠>을 하기로 했는데, 나는 그 전에 이 오페라를 단 한번도 지휘해 본 적이 없었다. 

근데 극장장은 내가 이걸 지휘해 본 적이 있었는지 아예 물어보지도 않는다. 

극장에서 이 오페라의 초연 영상을 비디오 테이프로 보내온다. 

그러면 집에서 ‘아, 여기선 이럴 때 음악을 시작하고, 이 곳으로 주인공이 들어오고...’하며 연출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혼자 배운다. 


공연 당일 아침 그 극장으로 간다. 

오늘 저녁에 공연할 주요 배역 성악가 몇명이 와 있다. 

그들과 만나 첫인사를 나눈다. 

조연출자가 와서 비디오 테이프만 봐서는 알기 힘든 몇몇 부분을 알려준다. 

이제 피아노를 놓고서 쓰윽 한번 진행 시켜본다. 

어느 누구도 노래를 제대로 부르지도 않고, 연기를 제대로 하지도 않는다. 

그냥 서로 중요한 지점만 확인하는 것 뿐이다. 

자기 아리아에서 지휘자에게 특별히 요청할 게 있는 가수는 따로 다가와 이야기를 나눈다. 

약 두세시간 가량의 미팅이 끝나면 다시 숙소로 돌아간다.


저녁이 되면 연미복을 입고 무대 밑 오케스트라 피트로 들어간다. 

들어가는 순간 박수가 나오고, 나는 생판 처음 보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일으켜 세운다. 

오케스트라 대표인 악장과 악수로 인사도 하는데, 

오페라 극장마다 악장이 앉는 위치가 다르기도 하기 때문에 엉뚱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 

돌아서서 관객을 향해 인사한다. 

관객은 2층까지 꽉 차있다. 

아까 들은 바로는 오늘도 매진이란다. 

무대 감독이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싸인을 보내면 지휘자 보면대 옆에 있는 전등이 꺼진다.

자, 이제부터 내 맘대로다. 

시작이다.


지휘봉을 젓기 시작하면 그에 맞추어 수십명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조금 느려지다가, 당기고, 달리고, 멈추고, 꽃 피어나듯 여리게, 폭발하듯... 

지휘봉은 흡사 마술봉이되어 소리를 변신시킨다. 

처음 몇 분만 지나면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벌써 지휘자의 작은 몸짓에도 익숙해져 있다. 

밀가루 반죽하듯 지휘하면 내 의도를 정확히 파악해서 그 모양대로 소리가 요리되어 나온다.

무대 위의 성악가들은 모두 지휘봉에 붙어있는 듯 맞추어 노래한다. 

합창단도 오랫동안 알고 지낸 동네 합창단 같다. 

아 저런, 어린이 합창단은 내 템포를 못 따라온다. 

이건 방법이 없다. 속도를 좀 늦춘다. 

시간이 지나, 미미가 죽고 로돌포가 울부짖을 땐 오케스트라도 오열한다. 

객석에선 환호가 터져나온다.


정말 신기하지 않은가. 

어떤 관객이 오늘 내가 바로 이 자리에서 이들을 처음 만났다고 믿을까. 

단 한번도 다같이 맞추어 본 적이 없지만, 정말 프로답게 좋은 연주가 가능하다. 

서로 정성껏 최선을 다해 맞추기로 암묵적으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음악적 신뢰가 정말 좋다. 

오케스트라 입장에선, ‘우린 어떤 지휘자가 오더라도 원하는대로 다 맞추어 연주할 자신이 있어.’, 

가수 입장에선, ‘나는 어떤 지휘자가 지휘하더라도 나의 음악성대로 노래할 수 있어.’, 

극장장 입장에선, ‘나는 이 지휘자가 연주한 걸 본 적도 없지만 믿고 표를 팔아도 돼.“, 

관객 입장에선, ‘나는 지휘자가 누군지 모르지만 돈 내고 볼만한 극장의 오페라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휘자 입장에선,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지만 이들을 통해 내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어.’

라는 자신감이 서로에 대한 어마어마한 신뢰로 중첩되어 있는 것이다.



처음으로 같이 연주하는 지휘자에게 합심해서 맞추는 것이 단지 그가 지휘자이기 때문은 아니다. 

반대로 처음으로 같이 연주하는 성악가에게 지휘자와 온 단원이 합심해서 맞추는 경우도 있다. 

누구든 서로 믿고 같이 놀 만한 사람이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호세 쿠라’라고 하는 매우 유명한 테너가 있다. 

하노버 극장에선 축제 때 이 사람을 불러 베르디의 <오텔로>를 공연했다. 

그는 공연 전날 밤 늦게 비행기를 타고와서 조연출과 함께 다음 날 공연할 준비를 한다. 

나는 그 옆에서 이런 저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눌 뿐이다. 

가끔씩 내 지휘에 맞추어 피아노 반주로 노래도 슬슬 불러 보는데, 

그때 마다 그는 스타답지 않게 꼬박꼬박 ‘아 마에스트로, 템포 딱 좋습니다!’를 연발한다. 


다음 날, 오케스트라 피트에 들어가 미어 터진 객석을 뒤로 하고 무대를 보니, 

어제 본 호세 쿠라는 어디가고 웬 거인이 서있다. 

저 오텔로가 쓰러지면 오케스트라 전체가 깔려죽을 것 같다. 

원래 저 사람이 호세 쿠라인데 오텔로가 된건지, 오텔로가 호세 쿠라에게 들어 온건지 모를만큼 딴 사람이다. 

혼자 서 있는데도 무대가 가득 찬다. 

첫 등장에서 낸 소리가 꼭 바로 옆에서 내 귀에다 대고 소리지른 것처럼 쩌렁쩌렁하다. 

그런데 웬걸, 어느 순간부터 혼자서 속도를 내어 마구 달리기 시작한다. 

흥분한 건지 고음을 앞두고는 웬만한 건 그냥 건너 뛰기까지 한다. 

큰일났다. 어제 그가 엄지를 치켜세우던 ‘딱 좋은 템포’는 이미 사라졌다. 

이제 나는 결정해야 한다. 

이걸 제지시키고 어제 약속대로 갈 것인가, 아니면 맞추어 함께 달릴 것인가. 

왼손을 들어 표시를 하려는 나, 그리고 그런 나를 바라보는 그. 

갑자기 그의 눈에서는 불이 뿜어져 나오는데, 이건 분명 같이 달리자는 가슴 끓는 신호다. 

그는 이미 어제의 호세 쿠라가 아니다. 

그냥 질투에 미쳐버린 오텔로일 뿐이다. 

나는 순식간에 결정한다. ‘오케이, 같이 달리자!’


무대 위에선 서양 거인 한 명이 미쳐 날뛰고, 무대 밑에선 조그마한 동양인이 지휘봉을 미친 듯이 휘두른다. 

오케스트라는 곧 눈치를 채고 의자 등받이에서 몸을 떼고 같이 달릴 준비를 한다. 

우리는 마치 둘이 미리 짠 것처럼 더 느리게, 더 빠르게, 함께 달린다. 

쉬는 부분에서 숨도 헉헉 같이 쉰다. 

이제 그는 자기가 어떻게 노래해도 내가 무조건 맞추어 준다는 것을 믿고 더 자유로워진다. 

아무리 짧은 프레이즈도 변화무쌍하게 꿈틀댄다. 

무대 위의 이야고도 이미 동참했다. 

안 그래도 그간 더 강한 오텔로를 찾고 있었는데 이제야 짝을 만났다. 

신난 오케스트라는 눈을 크게 뜨고 활털이 다 빠지도록 연주하는데, 

호세 쿠라의 노래에 따라 지휘봉이 한 마디 안에서도 이랬다 저랬다 속도가 바뀌니, 

오케스트라 단원 입장에선 집중도 이런 집중이 없다. 

분명히 거대한 철근인데 고무줄처럼 터질 듯이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한다. 

정말 말도 안되는 오텔로 연주다. 

연주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오텔로처럼 미쳤다.


연주가 끝나고 탈진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객석에선 무대를 향해 브라보를 외치며 난리가 났는데, 

오케스트라 피트 안에서는 단원들이 나를 향해 환한 웃음으로 발을 구르며 활로 보면대를 두드리고 있다. 

모두들 극도의 집중으로 인해 다들 탈진했지만 정말 즐거웠던 것이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전혀 다른 오페라를 연주한 듯한 표정으로 ‘어떻게 저런 노래에 맞춰서 지휘를 했어요?’라고 신기하다는 듯이 묻는다. 

나는 ‘어떻게 이런 지휘에 맞춰서 연주했어요?’라고 되물을 뿐이다. 

우린 아무도 ‘어떻게’는 모르니까. 그냥 다 즐겁게 미쳤었으니까.


커튼콜 하러 올라가니 호세 쿠라가 무대 뒤에서 사과 아닌 사과를 한다. 

사실 사과받는게 더 이상하다. 훨씬 즐거웠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명색이 지휘자였던 나는 헛기침을 흠흠 하고 눈웃음을 지으며 슬쩍 퉁명스럽게 한 마디는 던져야 한다. 

‘아, 템포 딱 좋습니다... 라구요?’ 

호세 쿠라는 크게 웃으며 나를 와락 껴안는다. 

잘못하면 뼈가 진짜 부러지겠다. 

아, 생판 모르는 사람과 처음 만나 무대 위 아래서 세시간 동안 서로 말 한마디 안하면서도 이토록 즐거울 수 있는 놀이가 세상에 몇이나 될까. 

우린 잘 놀기 위해 그저 서로 믿었을 뿐인데.



내가 지휘과에 입학하고 6개월이 지났을 무렵, 

선생님은 미국 필라델피아로 요한 슈트라우스의 오페레타 <박쥐>를 지휘하러 가시면서, 나보고 어시스턴트로 따라오라고 하셨다.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미국 오케스트라를 경험할 수 있었다. 

오케스트라 리허설 첫 날. 목관 음정이 깨끗하지 않아 조절해야 하는 부분이 생겼다. 

선생님이 파곳과 오보에, 그리고 플루트를 하나씩 쌓아가며 들어보자고 하니, 

오보에 수석주자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나는 제대로 맞게 불었단 말입니다!’라고 투덜대는게 아닌가. 

그러더니 보면대 밑에서 음정 맞추는 튜너 기계를 꺼내고는 거기에 대고 불면서 자기 소리가 맞다는 걸 헤르츠로 증명하겠다고 난리를 친다. 

뒤에 있는 파곳 수석이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그만 하라고 하는 동안에도, 

바로 옆의 플루트 수석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한마디 말도 없다. 

선생님이 ‘우리는 지금 수학을 하는 게 아니라 음악을 하는 겁니다.’라고 차분히 설득하고는 다시 하나 하나 조율을 해갔다. 

결국 4분의1음, 8분의 1음, 악기별로 조금씩 서로 올리고 내리고 다 조정해서 완벽한 화음을 이루어냈다.


쉬는 시간에 선생님과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아까 오보에 수석 옆에서 앉아있던 플루트 수석주자가 다가와 선생님께 사근사근 말을 건다. 

“마에스트로, 불쾌하셨죠?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저 사람이 정신적으로 좀 문제가 있어서 이런 트러블이 자주 일어나요.” 

“괜찮습니다. 음악은 서로 조율해 가면서 맞추어 가는 거지만, 자기가 내는 음정에 자신감도 있어야지요.” 

“근데요, 앞으로는 음정 안 맞는 일이 있으면, 저 사람은 지적하지 말고 저만 지적하세요.” 

“무슨 말씀이신지?” 

“저 사람은 제가 자기를 괴롭히려고 일부러 틀린 소리를 낸다는 망상에 빠져 있거든요.” 

“네?” 

반전이 일어났다. 

“저 사람이 제 전 남편인데 그런 정신적 문제 때문에 이혼한 거에요. 그러니 앞으로는 무조건 저만 뭐라고 하시고, 제발 저 사람에겐 뭐라고 하지 마세요.” 

“흠... 아니, 프로 오케스트라 리허설을 하면서 그럴 순 없지요.” 

그러자 또 반전이 일어났다. 

갑자기 그녀가 얼굴이 시뻘게지더니 꽥 소리를 지른다. 

“마에스트로! 저 사람은 오보에 리드 깎는 칼을 항상 가지고 있다구요. 언제 저를 찌를지 모른단 말예욧!” 


그녀가 시뻘건 얼굴로 쿵쿵거리며 가고 난 뒤, 나와 선생님은 멍하니 서로 쳐다보고 있었다.

도대체 누가 진짜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인지 우린 끝까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하필이면 지금 연주하는 오페레타 <박쥐>가 부부끼리 서로 속고 속이며 배신하는 코미디라는 사실에 헛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오보에 수석과 플루트 수석은 오케스트라 앙상블의 기본 축이다. 

그래서 항상 그들은 항상 지휘자 바로 정면, 오케스트라의 정 중앙에 나란히 붙어 앉아있다.

서로 뚱하니 앉아있는 그들을 앞에서 보는 사람도 이렇게 답답한데, 자기들은 얼마나 불편할까. 

자기들 연주의 재미없음은 말할 것도 없을테고, 

다른 사람의 연주의 즐거움마저 방해하면서 저렇게 음악한답시고 살고 있는 그들이 나는 좀 불쌍해졌다. 

우리 말 ‘노래’와 ‘놀이’가 비슷하고. 

영어, 독어, 불어의 ‘연주하다 (play, spielen, jouer)’ 란 말도 ‘놀다’와 같은 말이듯, 

원래 음악이 함께 놀기 제일 좋은 건데 말이다. 


놀기 좋아하는 우리 인간은 처음 만난 사람과도 신뢰만 있으면 정말 신나게 놀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가까웠던 사람이라도 신뢰가 깨지면 같이 노는게 더 이상 노는게 아니다. 

신뢰가 없으면 남들을 위해서라도 같이 놀지 않는 것이 낫다.



거리에 나와 ‘한번만 도와주세요’, ‘한번만 더 믿어주세요’라고 표를 구걸하던 사람들이 또 금방 신뢰를 깨버렸다. 

‘뜻을 같이하는 이여, 동참해 주세요’고 호소하던 사람들도 자꾸 신뢰를 잃어간다. 

아쉽다. 

신뢰만 있다면 어느 누구와도 함께 진탕 신나게 놀 수 있는데.



구자범의 제길공명 [7] 한겨레 칼럼 원본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 큰 어울림, 더 큰 자유  (0) 2014.12.13
높이와 품격  (0) 2014.11.15
멜랑콜리가 필요한 사회  (0) 2014.10.19
어색함에 익숙한 사회  (0) 2014.10.04
궁금해하지 않는 사회  (0) 2014.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