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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높이와 품격

by 구자범 2014. 11. 15.

높이와 품격 



열 살 무렵, 내가 피아노를 아무렇게나 막 치고 있으면 고등학생 형들이 와서 신기한 듯 보고 있다가 말하곤 했다. 

‘자범아, 누가 너 피아노 몇 치냐고 물으면, 천 친다고 해라.’ 

자기들끼리 깔깔대고 웃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는 나중에 대학생이 되어 당구를 접하면서야 알게 되었다. 

이처럼 내 주위엔 음악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내가 아무렇게나 피아노를 쳐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차이코프스키를 치는 걸 음대 피아노과에 다니는 형이 보더니, 

‘야, 너는 왜 D플랫 장조 곡을 D장조로 치냐?’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어, 이게 D플랫 장조 곡이었어요?’. 

정말 창피했다. 

악보를 본 적없이 음반에서 들은대로 멋대로 치고 있었던 건데, 음악 전공하는 사람에게 딱 걸린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뭐 별로 창피할 일도 아닌데,

그 땐 악보를 한번도 본 적이 없다는 것과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음정을 잘못 들었다는 것이 그리도 창피했다. 


알고 보니, 

우리 집에 있던 피아노는 기준음고가 낮은 미국식으로 조율 되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음정이 더 낮아졌고, 

음반에서 나오는 소리는 기준음고가 높은 독일식으로 조율된 오케스트라의 연주인데 설상가상으로 우리집 턴테이블 회전 속도마저 빠른 바람에 음정이 더 높아져서, 

나는 음반에서 들었던 웬만한 곡들을 모두 원래 조성보다 반음 높게 치고 있었던 것이다. 

원곡 조성대로라면 손가락 모양이 건반을 치기 편하게 되어 그토록 ‘자연스러운’ 것을, 

그것도 모르고 반음을 올려 치며 불편하다고 혼자 투덜댔었다.


전자 튜너는 커녕 소리굽쇠마저 없던 어린 시절, 

음향학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던 나는 무엇이 정확한 음높이인지 알 수 없어서 많이 괴로워했다. 

집과 동네 음악학원의 피아노 음높이가 다르고, 

회전 속도가 불확실한 턴테이블에 올려놓는 음반마다 그조차 서로 음높이가 다르니, 

결국 그 어느 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덕분에 음의 높이에 점점 ‘예민’해졌다. 

나중에 재생기계와 상관없이 음높이를 믿을 수 있는 CD란 매체가 나왔을 때, 

나는 거울의 방 미로에 혼자 갇혀있다 탈출한 아이마냥 매우 행복해 했다.


시간이 지나고, 이런 음높이 문제가 다행히도(?) 내 문제만이 아니라 음악사적인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기준음고가 자꾸 변하는 ‘인플레’ 때문이었던 것이다. 

음악의  빠르기, 셈여림, 기준음고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팽창했다. 

말이 가장 빠른 이동 수단이었던 시대와 비행기를 타도 덤덤한 시대의 빠르기 감각은 다를 수 밖에 없다. 

밤이면 풀벌레 소리만 간간히 들리던 시대와 언제나 냉장고가 웅웅거리고 자동차 소음으로 가득한 시대의 셈여림 감각도 다를 수 밖에 없다. 

대학 등록금 오르듯 기준음의 높이도 점점 올라갔다. 

지금은 기준음이 하도 올라가서, 

옛날 바흐가 느꼈던 가슴 아린 조성인 ‘B 단조 미사’를 당시의 기준음고로 연주하면 우리의 귀엔 반음이 낮은 텁텁한 B플랫 단조로 들린다. 

올림픽 표어처럼 음악도 ‘더 높이’를 선망했고, 

사람들은 금세 그 고음에 익숙해지고는 점점 더 높은 음을 추구했다. 

결국 이 인플레 덕분에 힘들어진 사람이 있으니, 바로 성악가들이다. 

악기야 그냥 높게 조율하면 그만이지만, 

성악가 입장에서 자신의 최고음보다 반음을 더 올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피나는 연습을 통해서만 간신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히든 싱어>라는 티비 쇼가 재미있다고 꼭 보라는 사람이 있어 한 번 봤는데, 

나는 그 ‘숨은 가수’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의 목소리를 평소에 들어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았다. 

그저 ‘정말 많은 사람이 저렇게 비슷한 목소리를 낼 수 있구나.’ 하고 신기해 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문득 ‘저 숨은 가수가 만일 파바로티 같은 성악가라면 이런 쇼가 있을 수 없겠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파바로티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똑같이 노래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그 자체로 세계 최고의 성악가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만일 김연아 선수의 피겨스케이팅을 똑같이 따라해보라는 쇼에서 그걸 성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이미 세계 최고의 피겨선수일테니 말이다. 


파바로티는 짜릿한 고음을 하도 쉽게 내는 듯 보여서 ‘하이 C의 제왕’이라는 별명을 얻은 사람이었다. 

대중음악 가수들이 쓰는 다른 여러 종류의 창법으로는 하이 C보다도 훨씬 더 높은 음을 내는 남자가수들이 많지만, 

오페라에서 노래하는 이른바 벨칸토 창법으로는 그게 결코 쉽지 않다. 

평소에 아무리 하이 C를 잘 내던 훌륭한 테너 가수도 실제 무대 위에서 노래하면서는 그 음을 제대로 낼 확률이 기껏해야 반반이란 말이 있다. 

심지어 ‘하이 C를 천 번 내면 죽는다’는 괴담같은 농담도 있다. 

테너들은 그 음을 제대로 내기 위해서 엄지발가락 끝에 힘을 주기도 하고 무대 소품에 몸을 기대기도 하는 등 별별 수단과 방법을 다 쓴다. 

그래서 하이 C가 나오는 아리아의 악보에는 반음 낮추어 그려진 오케스트라 악보가 옆에 덤으로 붙어있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워낙 힘들기에 많은 성악가들이 조금만 컨디션이 안 좋아도 반음 낮은 버젼으로 노래를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하이 C의 제왕’인 파바로티조차 말년에는 반음을 낮추어 불렀다. 

그러니 이런 소리가 무대 위에서 한번 ‘제대로만’ 나면, 

가수 자신이 너무 행복해서 오케스트라가 멈춰도 무시하고 혼자서 신나게 그 음을 계속 내고 있기까지 한다.


어떤 악기도 아무런 음악적 맥락없이 그저 한번 높은 음을 딱 냈다고 해서 사람에게 감동이나 흥분을 주지는 않는다. 

특히 피아노 같은 기계악기는 맨 오른쪽 끝 건반이 가장 높은 음이건만 아무리 눌러도 행복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테너 가수가 높은 음을 ‘제대로’ 한번 내면, 

그 음에 아무런 가사가 없더라도, 아무런 음악적 맥락이 없더라도, 

그 음 자체만으로 듣는 이의 팔에 소름을 돋게 하고 가슴을 뛰게 한다. 

정말 신비스러운 특성이다. 

그런데 테너의 고음은 과연 그렇게 특별하게 높은 것인가? 


옛날엔 ‘아이와 여자’를 함께 일컫는 ‘아녀자’란 말이 있었는데, 

여성 우위의 현대 사회에서는 금기어가 되었다. 

하지만 적어도 음역대를 설명하는데 있어서만큼은 ‘아이와 여자’의 성대가 같은 주파수로 떨린다는 점에서, 

음향학에선 지금도 유일하게 중립적으로 그 말을 쓸 수 있다. 

‘아녀자’가 변성기 지난 남자와 동시에 같은 노래를 부를 때, 

아녀자의 목소리가 남자 목소리보다 정확히 한 옥타브(주파수의 두배) 높다. 

즉 같은 악보를 보고 동시에 ‘A’음을 냈을 때 아녀자의 소리 주파수가 440Hz라면 남자 소리 주파수는 옥타브 낮은 220Hz인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여자들이 흥분하는 노랫소리는 남성성을 잘 드러내는 굵은 저음의 목소리가 아닌, 

오히려 여성에 가까운 ‘날카로운’ 목소리이다. 

대중음악 쪽으로 얼핏 생각해봐도 여자관객을 실신시키는 가수들은 대부분 얇은 고음을 내는 남자들이다. 

하지만 변성된 남자의 소리는 이미 옥타브가 한단계 낮으므로, 

그 고음이 아무리 높아봤자 물리적으로는 기껏 여자들이 내는 보통의 중음일 뿐이다. 

즉 파바로티의 짜릿한 하이 C는 오케스트라가 튜닝하는 기준음 ‘A’보다 겨우 두 음정밖에 높지 않다. 

그렇다면 그 여자들은 실제로 ‘높은’ 음을 들었기 때문에 흥분한 것이 아니란 말이 된다.



이제 ‘날카로운’이란 말이 나왔으니,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음향학적으로 놀라운 사실이 있다. 

바로 음에는 ‘높이’가 없다는 것이다! 

(아니 여태껏 음 높이를 말하다가 웬 봉창이냐고 욕할 독자에게는 미안할 따름이다) 

내가 오케스트라 앞에서 처음으로 지휘봉을 들었을 때, 

나를 가장 불편하게 했던 것은 ‘왼쪽’에서 높은 소리가 난다는 어색함이었다. 

오케스트라는 일반적으로 높은 음을 내는 바이올린 그룹이 지휘자의 왼쪽에 있고 베이스 그룹이 오른쪽에 있다. 

낮은 음이 왼쪽에 있는 피아노와 정 반대인 것이다. 

높은 음 건반을 항상 오른손으로 치며 오른쪽 귀로 들었던 나에게는 이십여년간 오른쪽이 ‘높은’ 쪽이었기에, 

낮은 음을 지휘하려 하면 의도와 달리 눈이 자꾸 왼쪽으로 먼저 갔다. 

오케스트라 앞에서 이 어색함을 지우는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런 식으로 본다면, 

기타 연주자 입장에서는 가장 높은 음을 내는 현이 가장 ‘밑’에 있다. 

또 하프 연주자 입장에서는 가장 높은 음을 내는 현이 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물리학자 입장에서 초당 진동수를 일컫는 헤르츠로 음의 특성을 이야기하자면, 

음이 ‘높다’라는 것은 진동수가 ‘크다’라든가 파장이 ‘짧다’라는 정도의 말로 쓸 수 있다.


결국 음의 ‘높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냥 상정한 심리적인 표현일 뿐이다. 

‘높다’라는 인식이 가능한 것은 ‘위아래’가 정해진 악보(우리의 정간보가 아닌 서양의 오선보)에서 위쪽에 그려진 음표를 볼 때 뿐이다. 

그러니 높은 음이라고 하지 않고, 

악기에 따라 오른쪽 음, 밑 음, 안쪽 음, 큰 음, 짧은 음 등등 뭐라 불러도 일관성만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음의 ‘높이’가 높이가 아니라면 음향학적으론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음향학자들은, 

오선보의 높이에 세뇌되지 않은 자연인이 느끼는 음의 특성을 표현한다면, 

‘날카롭다’와 ‘무디다’라는 말이 가장 걸맞다고 한다. 

음의 높고 낮음을 표시하는 기호인 ‘#’(sharp)과 ‘♭’(flat)의 이름이 음향학적으로는 가장 정확한 형용사라는 것이다. 

즉 음에는 높이가 없고 상대적으로 날카로운 음과 무딘 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음의 날카로움에 열광한다고 착각해 왔다. 

그런데 날카로운 정도를 주파수로 따지면, 

테너가 내는 하이 C보다 소프라노가 내는 하이 C가 두 배 더 날카롭고, 

피아노의 맨 오른쪽 C음은 여덟 배나 더 날카롭다. 

심지어 길 가는 아무 여자라도 붙잡고 내보라면 쉽게 내는 여성 중음역대의 D음이 파바로티의 하이 C보다 날카롭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날카로움보다 테너의 제대로 된 하이 C에 훨씬 더 열광한다. 

결국 우리를 감동시키고 흥분시키는 것은 음색과 음질 등이 만들어 낸 그 음의 ‘품격’인 것이다. 

제대로 된 날카로운 음은 뾰족한 쇳소리가 아니라 우리의 가슴을 어루만질 만큼 따뜻한 소리이다.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소리가 날카롭다고 행복해하는 사람은 없다. 

진정으로 우리를 흥분시키고 감동시키는 것은 매우 역설적이게도 그 날카로움이 뾰족함이 아니라 ‘품격을 갖춘 부드러움’으로 다가올 때이다. 



우주 공간에는 위아래가 없다. 

그러니 당연히 높이도 없다. 

그런데 우리 세상 이야기를 들으니 사람에게는 위아래와 높이가 있단다. 

‘사’자 들어가는 사위를 두고 부자동네 아파트에 살면 갑자기 스스로 ‘높은’ 사람이 되어 남을 머슴 부리듯 한단다. 

당하는 사람이 너무 괴로워서 자신의 몸을 불태워 자살할 만큼 함부로 하대를 한단다. 

사람이 그렇게 죽어도 그저 ‘높은’ 아파트 값이 그 여파로 떨어질까봐 걱정한다는 주민도 있단 얘기마저 들린다. 

재산을 조금이라도 더 소유하면 스스로 매우 높은 윗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나보다. 

하지만 대문호 위고가 높은 사람이라 여긴 미리엘 주교는 

‘장발장이 우리의 은식기를 훔쳐가서 먹을 그릇이 없어요.’라고 불평하는 노파에게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 고개를 들어 정색을 하고는 부드러운 소리로 이렇게 말했단다. 

‘근데 그게 원래 우리 거였나요?’


우리는 본성적으로 높은 것을 추구하는 지도 모른다.

혹시 높을수록 위치(potential) 에너지가 커지니, 그만큼 더 많은 것을 소유한다고 여기기 때문일까. 

하지만 물리학에선 그 잠재(potential) 에너지를 가능성의 의미에서 음수(-)로 나타낸다.

그러니 미리엘 주교처럼 마이너스가 큰 사람이 더 높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높이가 사실은 날카로움이라고 해도, 높은 곳이 반드시 피라미드 꼭대기처럼 뾰족할 필요는 없다. 

품격있는 소리로 조화를 이루는 오케스트라에선 가장 날카로운 음을 내는 바이올린의 수가 그 어느 악기보다도 많아서, 

그 어우러진 날카로운 음이 ‘자연스럽게’ 오케스트라 전체를 부드러이 감싼다. 


날카로움은 분명히 매력적이다. 

바닷가에 앉아 밤하늘을 보면 빛나는 별이 ‘날카로운 첫키스’의 황홀함으로 나를 흥분시킨다. 

나는 그 날카로움에 홀려, 그 별을 모래 위에 ‘별 모양’으로 뾰족하게 그린다. 

그러나 우주 어느 곳에도 뾰족한 별은 없다. 

모래 위의 별 그림은 사라지고, 그저 충분히 밝은 둥근 별이 저 멀리 있을 뿐이다.



<Sometimes B#, Never B♭, Always B♮>. 

높음 혹은 날카로움을 선망하고 추구하는 우리에게 던져진 음악적 경구이다. 

여기서 ‘B’를 동사 ‘be’로 여기고 뒤에 붙은 음악기호 이름을 읽으면 이런 명령문이 된다. 

<Sometimes be sharp, Never be flat, Always be natural.>

 - 가끔은 예민하게, 절대로 무디진 않게, 언제나 자연스럽게.


구자범의 제길공명 [8] 한겨레 칼럼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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