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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섬의 아픔을 뭍이 기억하다

by 구자범 2018. 4. 5.

섬의 아픔을 뭍이 기억하다



 

  

아픔을 기억하는 것은 매우 아픈 일이다. 

내 아픔을 기억하겠다고 다시 헤집어내는 과정은 너무나 고통스럽다. 

그러니 남의 아픔마저 내 아픔으로 기억하기는 더욱 어렵다. 


 4.3은 그저 슬픈 사건이 아니라 매우 아픈 사건이다. 

한 사건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사건의 당사자에게는 

“나는 너의 아픔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봐 줄게!”

라는 말처럼 잔인한 말이 없다. 

특히 억울한 죽음이라는 엄청난 아픔 앞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연극이나 오페라처럼 서사가 있는 예술작품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시선으로 사건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조폭을 응원하기도 하고, 

은행털이범이 도둑질에 성공하길 바라기도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1인칭 시점으로 감정이입해서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하는 예술의 놀라운 능력이다.


 베르디의 레퀴엠에는 두개의 시점이 존재한다. 

남의 아픔을 바라보는 3인칭 시점과, 

나의 아픔을 외치는 1인칭 시점이 어우러져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곡은 종교음악이라기보다는 오페라에 가깝다. 

일반 미사곡에서는 3인칭 시점밖에 없지만 이 곡에는 죽어가는 당사자, 

즉 주인공의 1인칭 시점이 있기 때문이다. 

오페라 작곡의 대가인 베르디는 솔로 가수들과 합창단 모두가 주인공이며 동시에 제삼자인 한 편의 드라마를 구성하여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레퀴엠을 만들어냈다. 


 곡이 시작되면 오케스트라의 현이 멜로디를 노래한다. 

합창단은 그저 주문을 외우듯 오로지 한 음정으로 ‘저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라고 중얼거릴 뿐이다. 

명백한 3인칭 시점이다. 

그러나 곧 이어 오버랩 되어 나오는 무반주 합창에서는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라며 당사자의 시점이 존재함을 암시한다. 

이제 2번곡은 1인칭 시점으로 ‘나를 구하소서 salva me’, 

‘나를 부르소서 voca me’라고 절규하듯 노래한다. 

이후 3인칭 시점으로 3,4,5,6번곡을 대단히 절제하여 노래하고, 

마지막으로 7번곡에서 

‘나를 해방하소서 libera me’ 

라고 다시 1인칭 시점으로 돌아가 격정적으로 노래한다.


  ‘저들을 용서하고 구원하여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라고 레퀴엠의 가사를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러나 ‘저들을 용서’하란 말은 없다. 

‘사악한 자들을 멸하시고‘라는 말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이 레퀴엠은 4.3의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마치 그들이 무슨 특정 종교의 죄인이었던 양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받아야 할 사람은 오히려 ‘나’이다.


비극 오페라의 주인공이 죽음 앞에서 처절하게 울부짖듯, 

2번과 7번곡에서는 내가 직접 그 죽음의 당사자가 되어 노래한다. 

이 때에는 종교, 사상, 이념이 같건 다르건 상관없이, 

죽음 앞에 선 ‘한 인간의 아픔’을 그대로 드러낼 뿐이다. 

음악인들은 가슴으로 노래할 때 이 아픔이 놀라운 감동으로 바뀌어 서로에게 전해진다고 믿는다. 

이 신비한 예술의 특성을 통해 그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기억해 보려는 것이다. 

  

남녀, 노소, 인종, 사상, 종교 등과 상관없이 그저 ‘인간적’으로만 이 기억에 접근하는 예술적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언어를 죽이고 음악만 살리는 것이다. 

우리가 ‘수리수리 마하수리’라는 주문 아닌 주문의 본래 뜻을 잘 모르듯이, 

이탈리아인도 라틴어로 된 전례문의 뜻을 잘 모른다. 

이탈리아 통일독립운동의 상징인 만초니는 

백여 년 전 그 분단된 조국의 언어를 통일된 조국의 언어로 만들기 위해 힘쓴 사람이다. 

그런데도 누구보다 이탈리아어를 사랑한 베르디가 그의 죽음에 바친 이 곡은 라틴어였다. 


그동안 나는 가능한 한 노래는 모국어로 부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 매번 번역을 했다. 

자기가 모르는 말로 노래하면 스스로 감동이 없고, 

노래하는 사람이 감동하지 않는데 듣는 사람이 감동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베르디의 의도 그대로, 

죽은 자 앞에 이미 ‘죽은’ 언어인 라틴어를 내놓는다. 

번역도 자막도 없다. 

꿈틀거리는 음악만 있다.

  

이 음악을 요약하면 이러하다.

“저들에게 영원한 빛을 비추고, 나를 해방하소서!”

70년 전 제주의 억울한 죽음을 아픔으로 마주한 우리가 3인칭이자 1인칭으로 해야 할 바로 그 말이고, 

오늘의 음악이다.



구자범


2018.4.3. 

4.3 추념 음악회 '베르디 레퀴엠' 팜플렛 글